한 해의 마지막은 누구에게나 한 번씩 찾아오는 커다란 쉼표다. 달력 한 장을 넘기는 사소한 순간 같지만, 사실은 일 년치 죽음 리허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시간에 가깝다.
오늘 하루를 살며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린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생각이 분위기를 가라앉힌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매일 죽음을 리허설하며 산다. 밤에 잠드는 일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행위이면서, 작은 죽음을 연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죽음 이야기는 무겁게 들리지만, 이보다 더 확실하고 현실적인 주제도 없다. 인간은 언젠가 끝이 온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이고, 이 사실을 알고도 일상으로 복귀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동물은 죽음을 모른 채 본능에 따라 살지만, 인간은 죽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 살아가곤 한다.
매년, 매달, 매주, 매일은 작은 종시의 반복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한 주의 마지막 순간, 하루의 끝에서 사람은 늘 작은 끝을 통과한다. 잠에 들며 의식을 내려놓고, 눈을 뜨며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는 이 반복이 인생의 리듬을 만든다. 인생은 크고 단 한 번뿐인 죽음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작은 끝과 시작을 오간다.
연말은 이 작은 끝들이 한데 모여 ‘1년짜리 종시(終時)’가 되는 시기다. 사람들은 송년회와 카운트다운으로 이 시간을 보내지만, 조용히 서서 “올해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묻기에 이보다 좋은 시점도 드물다.
한 해의 문이 닫히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올해 나는 씨앗이라면 싹을 틔웠는지, 흙 속에 굳어 있는 딱딱한 씨앗으로 남아 있는지 묻는다.
꽃이라면 향기를 조금이라도 내보았는지, 나무라면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었는지 자문한다.
열매를 맺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아직 ‘언젠가 열매를 맺을 존재’로만 머물고 있는지 돌아본다.
이런 질문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만 회고의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이 불편함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회고는 과거에 집착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만 주어진 정신적 기능을 사용하라는 요청이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의미를 찾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여기서 책임은 죄책감과 다르다. 죄책감은 사람을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지만, 책임감은 결과를 감수하겠다는 태도로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고, 그에 답하겠다고 마음먹는 존재다.
연말의 평가는 자기 비난의 시간이 아니라, “그래도 이만큼은 해 보았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간일 수 있다. 신앙과 철학은 삶을 괴롭히는 장치라기보다, 인간에게 자기 삶을 인수인계받으라고 요구하는 목소리에 가깝다.
언젠가 죽음이 가까워지면 말의 시대도 끝을 맞는다. 사람은 오래도록 말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설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말보다 느낌과 침묵이 앞서기 시작한다.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걸쳤던 언어라는 옷을 벗고, 고요 속에 들어가는 시간이 온다. 그 고요는 공허함이 아니라, 태아처럼 깊이 머무는 상태에 가깝다.
삶의 속도가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릴 때, 사람은 주변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속도를 줄이고 멈추면, 비로소 그동안 지나쳐온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멈춤의 순간에 우주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죽음의 문턱은 바로 그런 멈춤의 자리이기도 하다. 연말 역시 한 해를 단숨에 달려온 사람에게 “잠깐, 한 번 멈춰 서라”라고 요구하는 시간이다. 달력의 마지막 장은 시간의 소멸이 아니라, 다음 장을 넘기기 전 깊게 숨을 고르는 동작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신앙의 전통과 여러 사상은 이 마지막을 두려움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세상이 불타고, 가진 것들이 사라지고, 이름과 지위가 모두 무의미해지는 순간에도, 사람은 침묵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산이 바다에 빠질지라도 요동치 않는 마음, 그 고요함은 무력함이 아니라 가장 응축된 힘에 가깝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결국 삶에 대한 사유다. 사람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하루와 한 해라는 시간이 가볍지 않은 선물로 바뀐다.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일은, 곧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묻는 일과 연결된다.
인간은 손과 발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고 기도하는 존재다. 단순한 근육이나 감각을 넘어, 보이지 않는 의미를 찾고자 숨을 쉬는 존재다. 언젠가 이 모든 숨이 멈출 때, 사람은 자신이 하나의 빛 조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인간에게 주어진 일은 하나다.
매일의 작은 종시와 해마다 찾아오는 큰 종시를 통해, 조금씩 더 인간답게 살아보는 일이다. 연말의 끝에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
“올 한 해, 나는 어떤 씨앗이었고, 어떤 나무였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