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참 똑똑하다. 지구 반대편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하고, 음성 하나로 로봇청소기를 움직이고, 클릭 몇 번으로 우주 사진을 본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기술은 아직 1.0 버전이다. 세상은 스마트해졌지만, 여전히 사람은 답답하다.
예를 들어 보자. A가 B에게 돈을 빌려주고, B는 그 돈을 C에게 얻어 대신 갚는다. 그런데 C는 "굳이 내가 낄 필요가 있나?" 싶어 A와 B를 연결해 주고 사라진다. 겉보기엔 천재의 재정설계 같지만, 실제론 시세보다 빠른 책임 회피이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미루고, 돌리고, 잊어버리고, “논리적이라서” 괜찮다고 합리화한다. 인류가 동물보다 나은 건 머리 덕분이라지만, 가만 보면 그 머리가 가장 교묘히 자신을 속인다.
배 위의 부자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폭풍 속에서 “하나님, 살려주시면 집을 팔아 바치겠습니다!” 라며 신앙의 GPS를 켠다. 파도가 그치자마자 그는 곧 신호를 끈다. “기도를 안 해도 벗었을 텐데, 괜히 약속을...” 얼마 후, 그는 변호사를 찾아가 계약을 ‘정직하게’ 이행할 묘안을 찾아낸다. 개 한 마리를 10억 원, 집은 천 원에 팔아 천 원만 헌금했다. 인간의 창의력은 이렇게 위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미묘하게 슬프다.
우리는 과학을 발명하고, 신을 해설하고, 세상을 분석한다. 그러나 정작 ‘나’를 실험대 위에 올려놓는 일은 드물다. 남의 마음은 MRI처럼 들여다보려 하면서, 내 마음은 ‘업데이트 알림 무시’ 버튼을 누른다. 심리학자들은 이걸 ‘인지 부조화’라고 부르지만, 철학자들은 ‘무지의 자각’이라 말한다.
한 젊은이가 스승에게 물었다. “신이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강물 속에 처넣었다. 숨이 막혀 ‘죽겠다’ 싶을 때쯤, 스승이 제자의 머리를 놓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간절해야 신을 찾든, 자기 자신을 찾든 한다.”
오늘날 이 이야기가 다시 쓰인다면 아마 이렇게 바뀔 것이다.
“하나님이 있습니까?”
“검색해 보니 아직 업데이트 안 됐네.”
우리는 클릭으로 신을 만나려 하지만, 체험은 버튼이 아니라 숨참 기이다.
죽음을 앞둔 교수에게 한 영적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 말게. 자넨 죽지 않아. 왜냐하면 자넨 아직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욕망과 두려움으로 바쁜 인생을 ‘삶’이라 부르기엔 선뜻 부끄럽다. 학생 성적, 회사 성과, SNS 좋아요에 쫓기는 우리도 어쩌면 ‘사는 중이 아니라 살아내는 중’ 인지도 모른다.
종교든 심리학이든, 결국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는 지금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진짜 종교는 두려움이 없는 평정에서, 진짜 심리학은 무의식의 용기에서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장면을 그려보자. 어느 엄마가 아이가 하도 조용해서 뭘 하고 있나 하고 들여다보니, 아이가 “하나님”을 그리고 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잖니?” 하자,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내가 그리면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잖아요.”
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료한 존재의 통찰인가! 이 아이는 ‘모른다’는 어둠에서 ‘그려본다’는 창조로 건너갔다.
결국 인간의 위대함은 계산이 아니라 상상에 있다.
지능은 문제를 푸는 도구이고, 지혜는 질문을 품는 능력이다. 믿음은 두려움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두려움을 껴안고도 걸어가는 용기이다. 그러니 오늘,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지금 내 인생을 클릭하는가, 아니면 정말 살아보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