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됩니다, 괜찮습니다, 노 프라블럼

by 아침햇살

무엇이든 빨리, 많이, 세게 해야 할 것 같은 시대이다. 슬로건은 늘 비슷하다. “성장, 성취, 성공.”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뛰다가는, 정작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끝나겠는데?” 디오게네스가 시장판에 “금화 다섯 닢에 지혜를 팝니다”라고 써 붙였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요즘 듣기에도 꽤 촌철살인이다. 그가 부자에게 준 문장은 단 한 줄이었다. “무엇을 하든지, 네 처음과 네 끝을 잊지 말아라.” 그 말을 궁전 벽에 금글자로 새겨 넣은 건 부자였지만, 그 문장을 평생 가슴에 새겨야 할 사람은 어쩌면 우리 일지 모른다.


처음과 끝을 기억한다는 건, 우리가 “없는 데서 와서 없는 데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자꾸 떠올리는 일이다. 이 사이에 잠깐 있는 듯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하나님은 있는 데서 오셔서 있는 데로 돌아가시고, 중간에 잠깐 없는 듯 계신다. 우리가 보기에 안 보일 뿐, 늘 계셨던 분이다. 이 두 존재 방식이 한 지점에서 교차하는 순간이 십자가이다. 한 사람은 철저히 “없는 듯이” 사라짐으로, 언제나 계신 분이 그의 틈새로 스며 나온다. 제자들이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에게서 자기 것, 자기주장, 자기 공로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수라는 이름의 자리는 잿빛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사는 걸 끔찍이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 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문제”를 사랑한다. 문제가 있어야 내가 개입할 수 있고, 개입해야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이 나니까....


다른 누군가에게 “안 됩니다, 내일 오세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상한 쾌감을 느낀다. 아이가 “나가서 놀아도 돼?”라고 물을 때 “안 돼!”라고 말하는 순간, 부모의 존재감이 반짝 켜진다. “됩니다, 지금 해 드릴게요”라고 말하면, 정작 나는 배경으로 사라진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청소년 문제, 당회 문제, 재정 문제...” 같은 말을 즐겨 붙인다.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그 안으로 들어가 내 자아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이 반대편에 서 있다. 양팔은 못에 박혀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작위 하지 못하고, 권모술수를 부릴 수 없다. 대신 두 팔은 활짝 벌어져 있다. 누가 오든, 어떤 모습이든, 친구든 원수든, 모두를 환영하는 자세이다. 그리고 일어나는 일을 굳이 바꾸지 않고, 먼저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오늘식으로 말하면 “문제를 찾아 개입하기 전에, 먼저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곧 됩니다, 노 프라블럼”이 입에 붙은 사람.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 곁에서는, 내 문제가 좀처럼 “문제”답게 자라나지를 못한다. 대신 기쁨과 사랑이 자란다.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그 사람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덜 느끼게 된다. 자아가 뿌옇게 사라지는 쪽으로 가는데, 주변 사람들은 “저 사람을 통해 사는 게 더 살아난다”라고 느낀다.


발에 박힌 못은 우리의 또 다른 습관을 멈춘다. “어디 좋은 데 없나?” 하며 계속해서 더 먼 곳, 더 새로워 보이는 곳을 찾아가는 습관이다. 어떤 노인이 평생 런던에서만 살다가, 짐을 싸며 말한다. “나 이제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네.” 평생 그 도시에서 살면서도, 정작 런던이 무엇인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고백이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살면서, 정작 하나님 나라를 잘 모른다. 너무 익숙해서,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잘 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시를 바꾸고, 직장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면서도, 이상하게도 허전함이 가시지 않는다. 예수의 발에 박힌 못은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옮겨야 할 것은 정말 몸이냐, 아니면 눈이냐?”


어느 사냥꾼이 호랑이에게 쫓기는 꿈을 꾸다, 총알이 없는 총을 들고 절망하는 그 순간 “아, 이거 꿈이구나” 하고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깨닫는 순간, 호랑이도 텐트도, 심장 쿵쾅거리던 공포도 한꺼번에 사라진다. 인생의 처음과 끝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이 ‘꿈 깨는 눈’을 얻기 위해서이다. 삶이 꿈인 줄 알게 되면, 꿈속 호랑이에게 쏟아붓던 에너지를 거두게 된다. 그때 우리는 “예, 곧 됩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힘이 생긴다. 그 말속에는 “내가 다 해결해야 한다”는 긴장이 빠져 있다. 대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더 큰 이야기 안의 한 장면일 뿐”이라는 여유가 들어 있다.


반 고흐의 황혼 이야기는 이 눈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여인이 말한다. “제가 서른인데, 서른 해 동안 이 강가에 살면서 선생님이 오기 전까지 이 석양이 아름다운 줄 한 번도 몰랐습니다.” 고흐가 석양을 새로 만든 적은 없다. 그냥 고요한 혼과 깊은 눈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의 눈이 바뀐 것이다. 예수는 우리 인생의 반 고흐이다. 하나님은 늘 여기 계셨는데, 우리가 보지 못했다. 예수 곁에 잠시 앉아 있으면, 똑같은 일상, 똑같은 저녁하늘이 다른 색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자아를 부풀려야만 견디던 삶이, 조금씩 “없는 듯이” 살아도 괜찮은 삶으로 변한다.


궁극의 지혜는 그래서 의외로 단순하다. “나를 덜 앞세울수록, 하나님이 더 잘 보인다.” 디오게네스의 금화 다섯 닢짜리 문장은, 오늘 우리식으로 다시 적으면 이렇다. “뛰는 것도 좋지만, 가끔 멈춰 서서 네 출발과 네 도착을 떠올려라.” 십자가는 조용히 덧붙인다. “네 손발을 조금 묶어 둬도 괜찮다. 네가 비워 둔 자리만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더 깊이 스며든다.” 그리고 석양은 매일 저녁 같은 시간, 아무 말 없이 증언한다. “하나님 나라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 색깔이었다. 이제 눈을 들어 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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