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에서 바다로: 부활을 심리학으로 다시 읽다

세 가지 꿈에서 깨어나는 부활

by 아침햇살

우리가 매년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 이런 질문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정말 2,000년 전에 누군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과학과 의학을 아는 지금 내 삶과 무슨 상관이 있지?”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솔직한 사람일수록 이 지점에서 약간의 어색함과 양심의 가려움증을 느낀다.


그래서 이 글은 부활을 “사실이냐, 아니냐”로 따지려 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심리와 내면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려 한다.


6·25 무렵, 묘비에 새길 직함이 없는 사람에게 “학생”이라고 새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관도, 총장도 아니지만, “평생 삶을 배우다 갔다”는 고백을 이름으로 남긴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감정을 다루는 법도, 상실을 견디는 법도 모른 채 떠나는 인생이 훨씬 더 많다.


예수를 “30년을 배우고, 3년을 살고, 3일을 죽은 사람”이라고 표현해 본다면 어떨까. 그는 유명한 학위도, 화려한 스펙도 없었지만, 졸릴 때, 배고플 때, 버림받을 때까지 삶의 모든 순간을 “수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머리로만 분석한 것이 아니라, 몸과 감정 전체를 사용해 사랑하고, 분노하고, 울고, 포기하고, 다시 일어서며 배운 사람. 심리학 언어로 말하면, 강력한 자기 성찰과 마음 챙김으로 의식을 확장해 간 사람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움직인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 출근, 회의, 메시지, 퇴근 후 넷플릭스와 SNS까지, 몸과 머리는 쉬지 않는다. 현대 심리학은 이런 상태를 “자동 조종 모드”라고 부른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삶을 한 번도 ‘제삼자 시점’에서 바라보지 못한 채 흘려보내곤 한다.


예수의 부활을 이렇게 정의해 보겠다.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잠시 멈추어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의식하는 법을 배운 사람, 그 배움이 마침내 ‘완전히 멈출 수밖에 없는 순간’(죽음) 속에서도 더 깊은 ‘있음’을 일으킨 사건.” 이것은 마음 챙김이 말하는 ‘현재 의식’과도 닮았다. 성취와 소유의 찌꺼기들을 잠시 내려놓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보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연습이다.


또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 보통 사람의 의식은 땅 위의 작은 웅덩이와 비슷하다. 비가 오면 잠시 물이 고였다가, 금방 말라 사라지고, 쉽게 오염된다. 반면 예수의 의식은 큰 바다와 같았다고 상상해 보자. 그의 몸은 바다 위의 작은 섬에 불과했고, 진짜 주인은 넓고 깊은 의식의 바다이다. 현대 죽음불안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유한성과 죽음을 깊이 성찰한 사람일수록 삶의 의미와 관계를 더 진지하게 대하고, 심리적 안녕감도 더 높다고 한다. 웅덩이만 바라보면 죽음은 공포이지만, 바다의 관점에 서면 죽음은 큰 파도 중 하나일 뿐이다.


부활을 “세 가지 꿈에서 깨는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밤에 꾸는 잠의 꿈,

낮에 깨어 있으면서도 비교와 욕망, 불안 속에서 꾸는 심리적 꿈,

모든 것이 끝이라고 믿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꿈.


부활은 이 세 가지 꿈에서 하나씩 눈을 뜨는 연습이다.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또렷하게 보는 힘. “죽음”을 상상할 때 찾아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오히려 “지금 여기”의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힘.


마지막으로, 펑크 난 타이어의 너트가 모두 수채구멍으로 떨어져 절망하는 운전자에게, 정신병원 담 너머 환자가 “나머지 세 바퀴에서 한 개씩 빼서 쓰라”라고 조언했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는 말한다. “내가 바보라서 여기 있는 게 아니라, 미쳐서 여기 있는 거요.” 문제는 우리가 “정상”이라서 담 밖에 사는 게 아닐지 모른다. 너무 뜨뜻미지근해서, 깊이 믿지도, 사랑하지도, 배우지도 못한 채 안전한 선만 지키며 사는 것은 아닌지....


예수의 부활은 이렇게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너, 언제까지 구경꾼으로만 있을래? 한 번쯤은 ‘학생’이 되어, 미친 듯이 삶을, 사랑을, 진리를 배워 보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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