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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서커스와 하버드의 강의실

그리고 우리의 내일

by 맨모삼천지교

최근 읽은 한 기사가 머릿속을 오래 맴돌았습니다.

학령기의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엘리트 대학, ‘하버드’의 현실에 대한 내용이었죠. 지원한 학생의 97%가 떨어지는 명문 아이비리그의 대학교.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 막상 학생들은 수업에 빠지고, 독서 과제를 읽지 않으며, 발표를 꺼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다른 학생들과 의견이 충돌할까 두렵고,
과제를 충분히 읽지 않아 토론에 참여할 자신이 없기 때문.”(1)


세계 최고 지성을 모은 대학의 교실에서 이런 이유로 대화가 사라지고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그 기사를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세계 최고의 명문대생들도, 공부가 어렵고 하기 싫기는 마찬가지구나.'

그리고,
'하버드 학생들이 이렇다면...다른 대학의 현실은 더 심각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들이었죠.


그런데 이 기사속에 등장한 ‘교실 사회적 약속 위원회(Classroom Social Compact Committee)’가 올해 1월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한 가지를 더 지적합니다.
학생들의 참여와 몰입이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버드에서도 학점 인플레이션(grade inflation)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제 A학점이 절반을 넘어섰다고 발표했죠.(2)

이 기사에서 보이는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성적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훈련이 사라지는 징후라는 점이었습니다. 교수와의 깊은 대화 없이, 서로 다른 의견과 부딪힘 없이 졸업하는 학생들. 이들은 이미 ‘이념적 버블’ 속에서 안전한 대화만을 학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더군요.


같은 증상, 다른 이유.
하버드가 이렇다면, 한국의 대학들은 어떨까?

놀랍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A학점이 절반을 넘고, 평균이 4.0에 가까운 ‘완벽한 성적표’가 흔해졌다고 하네요.(3) 하지만 이 표면적 유사성 뒤에는 전혀 다른 병리 구조가 숨어 있습니다. 하버드의 학점 인플레가 ‘학생 중심주의’와 ‘교수 평가 리스크’가 만든 시장형 인플레라면 한국의 대학은 ‘취업 경쟁’과 ‘등록금 정체’ 속에서 생긴 생존형 인플레에 가깝다는 점이죠.

졸업생의 취업률과 재학생 이탈률이 대학의 존폐를 가르는 현실에서, 낮은 학점은 곧 민원으로, 불만으로 이어지기에 결국 ‘A를 잘 주는 교수’가 ‘좋은 교수’가 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지적입니다.


원인은 다를지언정, 결과는 같은 모습이죠?
하버드는 시장이, 한국은 제도가 학점을 부풀리고 있습니다. 노력의 증거였던 학점은 이제 관계와 제도에 의해 배분되는 자원으로 변화하는 느낌이죠.

성적은 높아졌지만, 교실의 공기는 점점 더 조용해졌습니다.

학생들은 질문을 멈추고, 교수는 날카로운 평가를 피하게 되죠.
배움의 공간은 토론의 장이 아니라 관리의 장이 되었습니다.


AI 시대, ‘조용한 교실’이 던지는 질문

이 변화는 단순히 대학이라는 공간의 문제일까요?
AGI, 즉 범용 인공지능이 인간의 학습과 사고 영역으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는 지금, 이 ‘조용한 교실’은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어떻게, 왜 배워야 하는가?”


AI는 이미 더 정확하게 요약하고, 더 논리적으로 글을 쓰며, 더 빠르게 문제를 풉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쓰게 하고, 시험을 보게 한다. 계산기가 더 빨리 답을 찾아내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손으로 수식을 푸는 법을 연습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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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프리미엄'이라는 단어가 붙는 글로벌 브랜드들의 마케터로 일하던 시기를 지나. 일본-뉴욕-한국을 오간 삶 속에 생긴 눈으로 아이를 키우며, 함께 자라는 중인 글쓰는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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