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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꿈을 포기할 수 없어요.

Real 뉴요커 엄마 사람 이야기. 세번째

by 맨모삼천지교

아주 많은 수의 여성들이 결혼,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지나며 많은 삶의 변화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육아와 가정을 엄마 개인의 꿈과 양립할 수 없어 포기하는 경우를 아주 많이 보게 된다. 그 이유는 환경적인 요인이 있을 수도 있고 개인의 선택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 어느 쪽이라 하더라도 진한 아쉬움이 남게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


그런 면으로, 그녀의 이름을 딴 Ashlyn New York 브랜드와 함께 세계적인 디자이너라는 꿈을 위해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와중에도...두 딸아이의 엄마이자 아내의 역할도 해내고 있는 디자이너 Ashlyn Park(애슐린 박/ 박상연)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어떻게, 무엇이, 그녀의 꿈을 지켜줬을까.


SS20 New York Trade show에 진출한 Ashyln New York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그녀가, 도쿄를 거쳐 뉴욕의 디자이너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 와중에 '엄마'라는 삶을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었는지, 무엇이, 누가 그녀가 이런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지... 궁금한 모든 것을 물어보았다.



스스로를 소개한다면,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으세요?

두 아이가 있는 엄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안주하지 않는 사람.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패션 업계에서 디자이너로... 그것도 자신의 브랜드를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 곳,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살게 되었나요?
그 간의 과정이 모두 궁금해요.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던

New York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삶의 모습


다소 어이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대학생 때부터 왜인지 모르게 뉴욕에서 커리어를 쌓고, 결혼 후 브랜드를 론칭해야겠다는 그림을 그렸었어요. 당시 제 머릿속의 '뉴욕'은 패션의 도시로 대표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주 막연하겠지만 언젠가 꼭 오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이화여자대학교 3학년 시절 대한민국 패션대전에서 은상을 받고 4학년 때는 서울 모델리스트 콘테스트 대상을 받았어요. 부상으로 일본에서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처음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마음속에 뉴욕을 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Journey from Korea to Tokyo, and NYC


일본에서도 So-en (요지 야마모토, 잇세이 미야케를 배출한 콘테스트)에서 외국인으로서 보기 드물게 수상을 했어요. 그런 이력을 토대로, 겨우 일 년에 두 명 정도만 신입 디자이너를 채용하는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쉽지 않게 얻은 기회라 정말 기뻤죠.

요지 야마모트 시절의 Ashlyn Park

일본은 디자이너라고 해도 디자인과 재단 그리고 봉제, 프레젠테이션까지 모든 과정을 해야 했어요. 도제식 수업을 몇 년 거치면서, 디자이너로서의 몸가짐 자세부터 기술 모든 것을 요지 야마모토의 방식에 따라 익혀야 했어요. 이 시간들은.... 훗날 제가 뉴욕에서 홀로 우뚝 설 수 있게 도와준 어마어마한 경험이었지만, 남성들의 군대 경험에 비견할 만큼 힘들었던 3년이었던 것 같아요. 엄청난 야근은 물론 충분하지 않은 인력과 시간 속에서도 단 4명의 팀원이 디자인부터 샘플링까지 일 년에 4번의 풀 컬렉션을 완성해야 했죠.


그러던 중, Y-3에서 일하면서 Adidas 팀들과 일을 하고 뉴욕에서 컬렉션을 수차례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오랜 꿈이었던 뉴욕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죠.

일본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시절, 그녀에 대한 소개가 실렸던 잡지


그래서.
정말 무작정 뉴욕에 있는 회사들에게 이력서를 보내고....
면접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다행히, 과거 일본에서의 경력과 수상이력 등으로 뉴욕을 베이스로 하는 다양한 브랜드의 면접 기회를 따낼 수 있었어요.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프로엔자 슐러(Proenza Schouler), 캘빈클라인(Calvin Klein) 등 한 번쯤 꿈꿔보았던 그런 회사들에서 면접을 보자는 이야기가 왔어요. 하지만, 미국의 경우 비자 문제가 매우 민감한데,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디자이너로 일하는데 필요한 비자 지원을 하는 정도의 규모의 회사가 많지 않았어요. 회사도 저도 서로 같이 일하고 싶지만, 비자 문제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던 경우를 마주하며 좌절했던 시기도 있었죠.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그래도 가능한 방법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미국에서 기약 없이 면접을 준비하던 그런 시기가 이어졌는데... 어느 날, 일본에서 콘테스트 수상 내용과 활동 이력을 기반으로 아티스트적인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아티스트 비자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본인 헤어 아티스트인 친구가 알려주었어요. 당시, 이미 일본에서 받은 상 등을 통해서 일본 매체에도 여러 차례 보도된 적이 있었기에 아티스트 비자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죠. 그리고 마침 모든 준비가 끝날 즈음, 인연이 닿은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과 함께 뉴욕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2012년부터 알렉산더 왕에서, 브랜드의 놀라운 성장기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애슐린의 디자인한 옷(좌측)이 대표작으로 노출된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에 대한 기사
Alexander Wang 에서 애슐린이 직접 디자인 했던 옷들

전성기의 알렉산더 왕에서 12번의 시즌을 완성하고, 리한나 비욘세 등 슈퍼스타들의 MTO(Made to Order) project 등을 통해서 뉴욕 마켓에 대해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죠. 과거 일본에서는 주력했던 남성복에 대한 노하우와 미국에서 새로 쌓아나간 여성복에 대한 경험이 쌓여... 옷에 대한 애정만큼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았어요.

뉴욕의 패션 업계에서 경험한 결혼과 임신, 출산은 어땠나요.

뉴욕이 임신한 여성과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일하기에는....

절대 너그럽지 않은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던 시기였죠.

보통 미국을 워킹맘의 천국이라 하는데...
임산부에게는 아닌 건가요?

음. 제 경험 역시 일부긴 하지만... 적어도 패션 필드는 그랬던 것 같아요.

디자이너 Ashlyn Park과 그녀의 두 아이들

그리고 인종의 차이에 따른 체력의 차이가 임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어요.

한국 사람들의 경우 입덧이 매우 심한 경우가 많잖아요? 저도 엄청 힘든 시기를 보냈었고요.

그런데.. 서양인들에게 입덧이란, 입덧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morning sickness’의 의미 그대로... 정말 아침나절 잠시 불쾌한 기분이 이어지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정말 레몬티만 먹어도 일반적으로 괜찮은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입덧으로 힘들어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 역시 이들에게는 이해불가의 영역이었죠.


또한, 출산휴가가 12주지만 그 기간은 모두 unpaid(무급여)에요. 그래서, 다들 아이를 낳고 한 달만에 다시 복직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아, 제가 아이를 낳은 뒤 2018년부터 법이 바뀌어서 지금은 좀 나아진 것으로 알아요.

그럼, 아이를 낳으러 가는 상황에 따른 경제적인 문제는 각자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건가요?

제 경우는 그랬어요. 당시만 해도 패션 필드에서 규모가 작은 회사들은 대부분 출산휴가가 무급여였죠. 유일하게 받을 수 있는 경제적인 지원은.... 보험사에서 나오는 약간의 보조금뿐이었죠. 심지어 그것도 출산 관련이 disable(장애인)로 분류되어 받았고, 8주동안 한 주에 300불(한화 약 35만 원) 정도가 전부였어요. 반면 남편의 경우 남편 회사에서 제공하는 보험 패키지가 저보다 좋았어요. 월급을 전액 받으면서 12주를 쉴 수 있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남성들이 3달의 유급휴가를 모두 쓰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저희 남편도 1달 정도 유급으로 출산 휴가를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출산한 뒤 2018년부터 뉴욕도 일부 법이 바뀌어 혜택이 조금은 나아진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맨모삼천지교 정보 - 보통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경우, 회사에서 직원에 대한 보험 비용을 부담한다. 일종의 직원 복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어, 어떤 회사에서 어떤 컨디션으로 일하느냐에 따라 받을 수 있는 보험 혜택이 달라지기도. 이는 노력하는 만큼 높은 성과를 내고, 좋은 회사에서 일하며 그에 따른 보험 패키지를 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직장을 잃을 경우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에도 접근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생길 수 있어 미국 내에서도 사회적인 문제로 오랜 기간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아동에 대해서는 선진적인 복지나 정책이 많은 미국이지만, 정작 그 이전의 단계인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복지가 2018년이나 되어서 지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상대적으로 매우 충격이네요.

출산율이 한국보다는 높은 편이라 상당히 좋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되려 이런 부분의 복지는 더 뒤떨어져 있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하고요.

임산부를 대하는 당시 일하던 미국 회사의 분위기는 어땠어요?


입덧이 너무 심해서 집에서 남은 일을 처리하고는 했지만, 그렇게 입덧으로 집에서 잔여 업무를 소화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변의 안 좋은 눈... 특히 직장 동료들의 암묵적인 질시가 느껴졌었어요.

미국에서의... 여성의 이미지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강한 여성'이라는 느낌이 한국보다 더 큰 듯해요. 그리고 실제, 아이의 출산 역시 심각한 신체적인 부담을 동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서 ‘출산’에 대해서도 그런 시선이 존재하죠. 그래서 이들에게는 제가 입덧으로 인해 배려받는 것이 거꾸로 '역차별'로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Image by Dan Evans from Pixabay
실질적으로 느낀 경험이 있었나요?

저와 같은 일을 하던 경력 30년 차의 60세가 넘으신 할머님이 계셨어요. 이 분께서 직속 상사에게 입덧으로 몸이 안 좋을 때는 집에서 잔업을 처리하는 저를 두고,

'왜 애슐린은 편의를 봐주느냐?'라고 이야기를 한 거죠.

그리고 그에 대한 매니저의 답변이....'그럼 당신도 임신하세요' 였답니다.


도와주려고 한 답변 맞나요.ㅠㅠ
그래서 어찌 되었어요?

그 덕분에(?) 제 문제가 회사 내에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죠.

그 당시 상황을 좀 이야기해보자면..... 제가 일하던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회사 자체가 엄청나게 성장하던 중이라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복지가 새로이 생겨나고 있던 중이었어요. 그 와중에 회사내 1호 임산부인 제가 생겼던 거죠.

당시 스스로가 도저히 기존의 반복되는 야근과 근무 환경 속에서 임산부로 제대로 성과를 보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만두고 싶다고 이야기했었어요.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당시 내부 디자이너들의 가장 많은 오더를 진행하고 있던 제가 계속 일하며 좋은 결과를 내주기를 바랬기 때문에 사표를 반려했어요. 그리고 마침 그즈음 직원들에 대한 복지도 확충이 진행되었는데, 임산부 관련 복지에 대해서 사내 1호 임산부인 제 의견을 물어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기 시작했었어요. 일테면.. 의자를 바꾸어 준다던지, 근무시간 이후 남은 잔업은 집에서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던지..

그런데, 일련의 논란으로 그렇게 제게 지원되던 일종의 임산부에 대한 작은 복지들이 모두 중단되었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그렇게 임신하고 나자.. 디자인 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임신을 하기 시작했었어요.


임신 사실을 대하는 동종 업계 사람들의 의식을 좀 알 수 있는 부분이네요......
다들 아이를 가지고 싶지만, 눈치게임 중이었던 것 같이 들리기도 하고요.

그만큼 아이가 있는 여성에게 관대할 수 없는 업무 환경인 걸까요?

동료 디자이너 중 하나는... 디렉터로서 승진을 제안받았는데, 그 뒤에 임신한 것을 알고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 임신했기 때문에, 24시간 일 할 수 없으니 승진 포기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죠.

그만큼, 치열한 이 곳 뉴욕 패션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다들 전쟁같이 지내는 와중에 마주하게 되는 '임신'과 '출산'은 분명 일하는 여성들에게 ”약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도 명백한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럼, 본인은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나요?
심지어 아이가 둘이고 이제 다섯 살, 두 살 반이라 아직도 부모의 손이 많이 필요할 나이예요.

저는 첫째 아이를 낳고, 2달 만에 회사로 복직했어요. 다행히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회사로 출퇴근하는 동안 남편이 집에서 필요한 엄마의 자리를 많이 채워주었죠.

또한, 한국에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님이 3개월마다 바꿔 오셔서 아이를 돌봐주시며 제가 회사로 복귀하도록 도와주셨어요. (*3개월은 관광 비자로 체류 가능한 최대 기간이다) 심지어, 첫째 딸은, 6개월 즈음되었을 때 한국으로 친정어머니가 혼자 데려가셔서... 몇 달을 돌보시고 다시 데려오신 적도 있으셨어요. 제가 아이를 낳은 이후 아마도 한국과 미국을 수십 번도 넘게 오가신 것 같아요.

엄마 작업실의 두 아이들


역시, ‘엄마’인 애슐린에게도 ‘엄마’의 도움이 있었군요.

그래도, 갓난쟁이를 떼어 놓고 나가는 그 마음...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제가 이런 갓 낳은 아이를 거의 하루 종일 얼굴도 못 보고 떨어져 있는 상황에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동료에게 토로했었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친구가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I know you are sad. But you have to pay the bill."

(네 마음이 슬픈 것 알겠어.. 그런데, 내야 할 카드 고지서가 있으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니)

돈으로 비유했지만, 모성이 가진 감정의 부분과 제 꿈의 실현이라는 현실의 경계선이 와 닿는 한마디였죠.

작업실에서 엄마의 도구를 만지고 있는 둘째 딸 클로이.
마음도, 커리어의 유지도 모두 쉽지 않았겠어요.

아무리 남편이 많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엄마만이 해줘야 할 몫 역시 분명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알렉산더 왕 이후, 닐리 로탄으로 9-6로 근무시간을 정하고 이직을 했었어요. 하지만, 계약으로 명시한 근무시간 때문에 삭감된 월급 대비, 실제 일의 양은 그대로인 힘든 상황이었어요.

결국 회사도 저도 중간 합의점을 찾기는 어려워 프리랜서로 전향해서 프로엔자슐러, Dion lee 디온 리, thakoon 타쿤 , 카이트 Khatie 등과 일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브랜드랑 함께 일하더라도 제가 진행한 디자인들이 메인 피스로 컬렉션에 세워지는 것을 계속 마주하며 '나의 브랜드'에 대한 준비도 서서히 시작하게 되었죠.

WWD 매거진에서는 2019년 뉴욕 패션위크의 떠오르는 브랜드로 Ashlyn New York을 지목했다.

그런데, 막 첫 번째 컬렉션 론칭 직전에, Calvin Klein(캘빈클라인)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라프 시몬스를 위주로 새로 짜인 팀에서 저를 영입하고 싶어 했어요. 세계적인 디자이너와의 협업은 늘 좋은 영감을 주기에, 캘빈 클라인에 조인했었어요. 이 시기는, 일도 재미있고 인정받는 동시에 끊임없이 '가정'과 '일'의 양립에 대한 저희 인내를 테스트받는 기간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와중에... 제 브랜드의 두 번째 컬렉션을 내야 할 시기가 임박하여 제 브랜드에 온 힘을 쏟기로 결정했습니다.

한국은 심각한 저 출산율인데.. 그렇게 커리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둘을 키웠는데, 어떻게 가능했고, 둘째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한 중요한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한국의 비슷한 또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도 아이 키우기 쉽지 않은 것 같지만...

저는 되려 미국이었기 때문에 거꾸로 가능한 생각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나 남편이나 부모님은 모두 한국에 계시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민 1세대나 다름없는 삶이지요. 그래서, 친인척이 없이 오롯이 저희 부부와 아이만 이 미국 땅에 존재하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평생 우리가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기는 어렵기에... 형제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매우 주요했던 것 같아요.


그 모든 '엄마'이자 '디자이너'를 양립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 곳,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살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전 세계적으로, 뉴욕이 디자이너의 샐러리가 가장 높다는 것이 가장 큰 진리겠지요.

그래서 디자이너라면 모두들 뉴욕에 와서 일하고 싶어 하죠. 디자이너들이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는다는 뜻이에요. 즉, 세계 다른 그 어느 도시보다 디자이너들이 끌어내는 창의력에 대한 가치를 크게 인정해 주는 곳이라는 거죠.

아! 물론, 그만큼 일도 더 시키죠. 아주 많이요(웃음)


또한, 실력만 인정받는다면 단기간에도 엄청난 성장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시장이에요.

요지 야마모토는 워낙 큰 회사고... 큰 구조안에서의 협업을 많이 배웠다면, 제가 미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알렉산더 왕은... 당시만 해도, 직원들에 대한 비자 스폰도 하기 어려운 정말 작은 규모의 브랜드였어요. 바로 그런 규모이기 때문에 제가 여러 가지를 더 크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인했는데,, 불과 3년이라는 기간 안에 작은 회사가 엄청난 성공과 성장을 이루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었죠. 그런 다이내믹함은 바로 뉴욕에서만 가능한 그 무엇인 것 같아요.


즉, 미국은, 뉴욕은... 적어도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 분야의 최고에 도전해 볼 수 있는 시장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아무도 무언가를 가르쳐주지 않죠.
Ashlyn New York 2020 S/S

그러니 그 안에서 모두들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치열하게 공부하고 노력하고
경쟁하죠. 그리고 그 끝에 살아남은 자들의 승리는 정말 달콤한 그것이고요.
그래서, 뉴욕을 기회의 도시라 칭하나 봐요?

그 말에 정말 동의해요.

일본에서 받던 월급의 10배를 3년 후 뉴욕에서 받을 수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제가 디자인한 옷이 메인 피스로 컬렉션 런웨이에 스는 것은 물론... 저보다 경력이 30년은 더 많은 고경력자를 3년 만에 여러 가지 기준에서 앞서게 되었어요. 연공서열이 중요한 사회 문화라면... 이런 식의 성장을 경험해볼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Ashlyn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들
그런 면에서, 기회의 도시로 기회를 잡기 위해서 도전을 멈추지 않은 당신을 정말 용감하다고 생각해요.

그럼, 이야기를 좀 바꾸어서... 디자이너 애슐린이 있게 도와준.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요.
남편과의 가사분담은 어떤가요?
브랜드를 운영한다는 것이, 결국 맞벌이를 하고 있는 셈인데... 어떠세요?

남편이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하원 후에 아이들을 씻시고 돌보는 것 등을 모두 남편이 저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하고 있어요.

제가 다른 브랜드에 소속되어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 늦게 퇴근을 했던 시기에는, 정신없는 아침 시간에만 아이 돌보기를 도와주시는 분이 오셔서 아이들 등원 준비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도와주셨었어요. 집안일 중 빨래와 청소는 모두 남편이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저는 주로 요리를 담당하죠.

재택근무가 가능한 남편의 직업적인 특성과 가정에서의 시간을 즐기는 남편 덕분에, 저 역시 제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이 되었던 것 같아요.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낸 덕분에, 저희 아이들은 아빠와의 애착이 세상 누구보다 단단하답니다.


그녀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인 남편. 그리고 두 아이들


엄마이자 디자이너라서 어떨 때 가장 힘든가요?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부분이 가장 어려운 점인 것 같아요. 미국은 모든 분야에 socializing(소셜라이징- 사회관계를 쌓는 노력) 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실제 5살과 3살 두 아이를 돌보는 일만으로도 제 하루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적어도 지금은 좀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서 이런 부분 역시 점차 나아질 것이라 믿어요.


물론,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달관하는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에요(웃음)

육아 초기에는 남편과 서로가 힘든 상황에 대해서 불평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미국 부부들의 경우, 아이를 맡기고 date night(데이트 나이트)도 많이 가지지만,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의 문화가 익숙한 저희에게는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부부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죄스러운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지고는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가족 모두가 함께 있는 시간 중 일부를 쪼개서 번갈아 가며 한 사람이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다른 사람은 밀린 일을 하거나, 필요한 사회 활동에 시간을 쓰는 방식으로 보완하고 있죠.

언제나 그녀의 삶과 일에, 전적인 지지를 보내는 그녀의 남편과 두 딸들.
아무래도... 미국 내에서도 한국 엄마들의 교육열은 유명하잖아요?
두 딸아이들 교육에 특히 신경 쓰거나 주의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음...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부분인 것 같아요.

제가 이 곳에서 일을 하면서 부딪혀 본 미국 사회는.... 뉴욕에서 일을 하고, 유명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인종적인 차이를 넘어서야 하는 부분이 분명 아직 존재해요. 그 상황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주류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학습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 역시 사실이라는 것이 가장 걱정스럽죠. 주변을 돌아봐도 많은 아시안계 부모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이 이 과정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애써요. 일테면.... 남자아이들의 경우 1년을 미루어 조금이라도 더 성장한 뒤에 학교에 보내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죠. 체력적인 차이로 발생되는 문제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노력이랄까요.

브라이언트 파크에서의 첫째 딸, 헤일리

저희 아이들 역시 미국에서 태어났고, 아마 오래 이 곳에서 살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태어나고 자란 환경 덕분에, 한국에서 자라서 성인이 되어 미국으로 온 저희와는 다른 생각과 삶을 살게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 자라는 과정에서 인종적인 차이로 인한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 매우 많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부모인 제가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상처 받지 않는 튼튼한 마음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부분이라 생각해요.


그럼, 두 딸들이 미래에 했으면 하는 직업이나... 권장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어느 한 장소에 고정되어 일하는 직업보다는, 스스로 좀 더 자유롭고 즐겁다는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을만한 일을 하면 좋겠어요. 그래서, 예술 쪽으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하는데, 어쩌면 그건 제 경험이 투영된 부분인 것 같아요.

엄마의 작품이 나온 패션쇼장에 간 딸 헤일리

실제 무언가를 디자인하고 내 브랜드를 내고... 하는 이 모든 과정은 스스로를 가장 치열하게 들여다보아야만 가능한 것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 주관이 어떤지를 더 깊이 있게 생각하고 잘 알게 되죠. 그리고 그런 일련의 과정은 직업을 떠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잘 알고, 스스로의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자기 자신이 잘하는 그런 것들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는 것은 어떤 직업을 갖느냐에 앞서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인생의 숙제니까요.

그래서, 그런 인생의 과제를 함께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동시에, 그래서 부모로서 아이들이 원하는 방향을 찾았을 때 잘 서포트해 줄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잘 자리 잡게 되기도 바라죠. 물론, 가장 기본인... 일반 교육 과정을 우수하게 잘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요:)



아이를 키우는 현실적인 생활과 영감을 떠올리고 창조하는 디자이너의 삶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나요?


음.. 그건 오랜 기간 쌓인 ‘관성’과 ‘근성’ 덕분인 것 같아요.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디자이너로서의 창조 과정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입덧이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쉬어야 했었어요. 간신히 첫째 아이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정신이 온전히 아이에게만 가지 않고, 새로운 디자인과 새로운 쉐입을 연구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미 십여 년 넘게 해오던 시간 속에 이미 제 몸이, 제 머릿속이 창조하는 과정을 쉬지 않고 반복하고 있던 거죠. 심지어 일을 쉬고 있던 와중이었는데도 말이에요.

Ashlyn New York 2020 S/S

그래서, 바로 그때 이미 스스로가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하고 제 브랜드 Ashlyn NewYork 론칭의 밑 작업을 하기 시작했죠.

[근성]으로 만들어진 '엄마'와 '디자이너' 사이의 연결고리

끝없이 떠오르는 디자인에 대한 영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면,

그 영감을 현실과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어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만삭이 되어 쉬고 있을 때, 프로엔자 슐러에서 또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 왔어요. 그때 제 마음속을 솔직히 들여다보니, 디이너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정말 강한 것을 볼 수 있었죠. 그래서 만삭이었지만, 프로엔자 슐러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어요. 집에도 작업실이 있지만, 때로 집과는 다른 환경에서 또다시 살아나는 영감이 있거든요. 그래서, 일주일에 2번이던 3번이던, 프로젝트건, 계속 다양한 브랜드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감각을 유지하고 손끝이 무뎌지지 않도록 무던히 애썼어요.


바로 그 '근성'이 '관성'처럼 떠오르는 디자인에 대한 생각과 만나 서로 완벽히 다른 2가지의 삶 사이에서 조화롭게 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 같아요.


그럼, 두 아이의 엄마라는 점이 당신의 일에 더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나요?

패션과 디자인 필드는, 엄마로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이 도움보다는 약점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분야인 것 같아요. 실제로.. 어떤 사람은, 제가 디자이너로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엄마라는 사실이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고 제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흔들리지 않고 제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가정과 아이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실제 '창조하는 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감정에 매우 솔직한 편이고... 쉽게 말하면 감정 기복이 심하기도 해요. 저 역시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타입이에요. 그래서, 제가 만약 싱글이고 지금과 같이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하고 운영했다면, 마주하는 어려움마다 감정을 많이 소진하며 많이 힘들어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제게는 지금 아이들이 곁에 있고, 그 아이들의 웃음과 에너지가 어떤 상황에라도 내가 바닥 끝까지 가라앉지 않게 나를 잡아줘요. 동시에 '내가 여기서 헤매고 있으면 안 되지'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죠.


이렇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라고

외치게 해주는 저의 정신적인 지주는 바로 아이들이에요.

그리고 지금 제가 키우고 있는 아이 둘은 모두 딸이에요.

저 역시 다른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아이들에게 "나중에 큰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삶을 즐겁게 헤쳐나가렴"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 제가 겪고 있는 가정과 일의 양립을 위한 과정 중 어느 부분은 제 딸들도 분명 미래의 어느 시점에 겪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더더욱 이 일을 포기하거나 대충 할 수 없어요.

엄마가 되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닥치는 힘든 상황들도 잘 헤쳐나가서 꼭 꿈을 이루라고...
꿈을 이룬 사람으로서, 엄마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거든요.
요즘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브랜드를 키워가고 있기에, 이 브랜드가 잘 자리잡기 위해 제가 어떤 부분을 더 주력해야 하는지... 에 대한 부분이 가장 고민이에요. 사실, 저는 태생이 '디자이너'라, 무언가를 창조하는 역할에 더 주력해야 하는데, 혼자 브랜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비즈니스적인 면 역시 놓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많은 인력 없이 꾸려나가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머지않은 미래에 세일즈와 프로모션 등이 함께 가능할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 저는 제가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오롯이 옷을 만드는 부분에 포커스 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녀의 브랜드이자 그녀의 이름이기도 한, Ashyln New York

하지만 이 과정을 '걱정'하고 있지는 않아요.

첫 컬렉션 슈팅을 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브랜드 이름을... 내 묘비에 새길 수도 있겠구나' 라구요. (웃음)


아마도 Ashlyn NewYork이 제 모든 아이덴티티를 오롯이 담아낸 결과이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프로세스를 충분히 즐기고 있어요. 조금씩 조금씩 새로이 나아지고 진화하고 있는 이 과정이 행복하고 즐거워요. 모두가 제게 약점이라 이야기하는 '아이'가 있음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이것을 해 내고 있다는 벅찬 성취감이 더 크기 때문이죠.

제 인생의 목적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닌, 히스토리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남들이 하지 않은 도전을, 분야를 해냈을 때 제 삶이 의미 있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얼마 전 WWD에 보도된 그녀에 대한 소개 기사 중, 이런 부분이 있었다.

과거 수많은 유명 브랜드들의 디자인들이 그녀의 손을 통해 나왔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에는 소속 브랜드들로 소비자들이 그녀의 옷을 만났기에 Behind- the -scene designer로 머물러 사람들을 그녀를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 긴 시간을 쇼의 검은 장막 뒤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는 바로... '엄마'가 되는 삶의 단계를 거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만약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Ashlyn New York이라는 브랜드를 좀 더 일찍 만났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Ashlyn 애슐린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더 빨리 알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딸을 얻는 과정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지켜온 디자이너로서의 꿈에 대한 열망도 이렇게 강렬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또한, 아이들에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라도 절대 그만두거나 지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의 디자이너 애슐린을 볼 수 있었을까?


그녀가 스무 살 무렵부터 가진 작은 빛줄기에 불과했던 꿈은, '엄마'라는 역할의 프리즘을 만나 굴절이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결국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색으로 온 사방을 향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보다 더 아름답기 어려울 정도로.

Photo by Matthew Henry from Burst


맨모삼천지교 정보


*애슐린 뉴욕 홈페이지 : https://ashlynnewyork.com

*애슐린 뉴욕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ashlynnewyork/

*2018년부터 뉴욕시도 법이 바뀌어, 지금은 아이를 출산에 관계된 직원의 경우 New York Paid Family Leave (NYPFL)를 통해 임금의 일부를 지급받는 유급휴가 사용이 가능해진 것은 물론, 개인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형태의 직원에 대해서도 출산에 따라 일부 유급 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법령이 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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