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양육자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냉정함을 통탄하며.
2019년 11월 겨울왕국 2가 개봉했다.
그 어느 곳보다 신작 영화의 개봉도 반응도 빠른 한국이기에, 미국과 같은 날 한국의 어린이들도 엘사와 안나를 만나러 갔다. 겨울왕국의 후속작에 대한 반응은 당연 폭발적이었고, 개봉일을 기다려 주인공의 코스튬을 입고 기대에 가득 차 극장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각종 sns를 포함한 부모들의 소통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국과 같은 날에 개봉한 미국에서도, 이미 수개월 전부터 캐릭터들의 각종 책이며 장난감들이 마켓에 깔리기 시작한 덕에 이미 우리 딸 역시도 지구 반대편의 한국의 또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상영관에서 아주 신나게 영화를 즐기기로 했다.
시작 전, 다 같이 보는 공간이라고 다섯 살인 우리 아이에게도 주의를 주었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아이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는 장면도 있었고 전후가 이해가지 않는 부분은 엄마 아빠 귀에 소곤소곤 질문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영화관 내에는 아이들 숫자가 어른 숫자보다 많았고, 중간중간 아주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와 그 아이를 얼르기 위해서 출입구를 서성이는 어른의 발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급하게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이, 우리는 매우 이해가 갔다.
주말에 아빠 없이 아이 둘을 데리고 온 엄마라면, 큰 아이가 신나게 영화 보는 도중 울음이 터진 둘째를 얼르기 위해서 영화관 밖으로 아예 나가지도 못하고 EXIT 불이 깜빡이는 문 앞에서 종종걸음 칠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영화보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와도 작은 뱃속의 방광이 1시간 반의 영화 중에도 또 차오를 수 있으니까. 이런저런 상황들이 아이가 있다면 충분히 발생 가능한 그 모든 상황이 '부모'인 우리에게는 이해가 가는 그런 상황들이고 소음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 하나도 이를 두고 불쾌한 티를 내거나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당연히' 어른이자 한 아이의 부모인 우리 역시 함께 이해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하며 극장을 돌아 나왔다.
그런데, 개봉 후 얼마 즈음 지났을까.
한국을 포털 사이트를 보던 어느 날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많이 몰리는 이 영화에 대해서, [아이 없이] 관람하고 싶은 어른들이 '노 키즈존 영화관’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들.
각종 매체에 도배가 된 기사를 읽어 내려가며 황당함을 가릴 방도가 없었다. ‘아이들이 소란스러워서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라는 것이 노 키즈존 영화관을 요구하는 주된 이유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며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똑같은 영화를, 똑같은 시기에 본 한국과 미국에 무슨 차이가 있기에...
심지어 한국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영화관을 찾는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요구가 터져 나오지 않는 것인가?
미국의 아이들이 한국의 아이들보다 훨씬 덜 소란스러운가?
그래서 '시끄러워 같이 못 보겠다'는 어른들의 요구가 미국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인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아이를 키워본 내 입장에서 지켜본 양국의 아이들은, 모두 언제나 에너지가 넘쳐 매우 부산스럽고 여러모로 크고 작은 소음을 양산한다는 점은 매우 동일했다. 이건 어쩌면 전 지구 상의 아이라는 존재가 가진 공통적인 특성이 아닐까?
그러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 당연히 [나라와 문화에 따라 아이들의 시끄러움의 정도가 달라지지는 않는다.]인 것은 물론, 아이들의 '아이스러움'을 더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문화 덕분에 어찌 보면 미국의 아이들이 더 밖으로 스스로를 표출하는데 거침이 없다.
한국의 극장 시설이 아이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에 더 민감하게끔 구성되어 있는가?
이 부분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미국의 영화 입장권의 가격 평균 $9.26(물론 우리가 사는 뉴욕은 임대료의 영향인지 저 가격보다 약 1.5~2배 수준인 듯..)는 한국의 영화 입장권의 가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관이 제공하는 1인 좌석의 공간이 훨씬 크고 (미국인의 체격을 고려한 부분이겠으나) 통로를 오가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공간이 여유로우면 당연히 주변인의 움직임이나 소음에 덜 민감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극장이라는 밀폐된 환경에서는 그 안에서 발생되는 아이가 운다던가 떠드는 소리는 결국 다른 관람객의 귀에도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은 동일하거니와... 전체관람가 영화의 경우 매 번 극장에서 한국보다 압도적으로 훨씬 많은 수의 유소아 동반 가족을 마주하게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공간이 넓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소음의 수준은 대동소이하게 느껴진다.
미국에는 노 키즈존이 없는가?
미국에도 아동이 입장할 수 없는 곳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아주 무거운 운동 기구가 있어 아이들이 다칠 위험이 있는 체육관이라던지, 뜨거운 고데기 등이 있어 아이가 화상을 입을 위험이 있는 헤어 살롱 등 아이를 사고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상의 목적으로 아이의 입장을 금하는 것이지 '아이를 대동하지 않은 이용자의 편의' 또는 '운영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노 키즈 존은 아니다.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일부 레스토랑에서 아이가 없이 조용히 식사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kids ban 아동 금지]이라는 표지를 써붙인 구역을 설정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미국의 연방법을 들여다 보아도, 사업주에게 인종, 종교, 국적, 장애여부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긴 하나 "나이"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는 별도의 조항을 설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상 아이에 대해서 입장을 금지하는 것이 위법사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장소들이 충분히 사용이 가능한 [아동 금지]와 같은 표지를 붙이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이와 같은 아동 금지로 인한 이익보다는, 이를 붙임으로써 받게 될 인근 주민들로부터의 비난을 기초로 한 사회적인 평판과 이로 인한 손실이 더 두렵기 때문이다. 이는 단편적으로,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아동에 대한 차별을 행하는 것이 어떠한 시선을 받는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유럽은 어떠할까?
보통 유럽은 미국에 비해서는 노 키즈 존이 상대적으로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정보를 이유로, 한국도 노 키즈존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실제 일부 유럽의 오래된 레스토랑이나 Bar, 파인 다이닝에서는 특정 시간 이후(주로 아이들이 저녁식사를 마치는 7시) 아이들의 입장을 금지하는 경우가 있지만....
한국의 노 키즈존의 양상과는 몇 가지 큰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아동 입장의 제한이 일반적인 생활 활동에 제약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는 점.
이와 같은 입장 불가 정책은 일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나 고급 호텔 등을 위주로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일반인들의 기본적인 생활 동선 내에 있는 일반적인 카페나 베이커리, 레스토랑 등에서 이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 영국이나 독일에서 실제 현재 육아 중인 분들께 문의해 보아도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가 그분들의 생활 반경 내에서 '노 키즈존'을 마주한 경험이 없다는 코멘트를 들을 수 있었다. 일상적으로 갈 수 있는 베이커리와 까페, 작은 식당 등에서 입장을 거부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둘째, 그 공간들을 제외하고도 매우 많은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곳곳에 넘쳐난다.
이러한 일부 노 키즈존을 제외한 일반적인 대부분의 공공장소나 박물관, 뮤지엄, 가족 위주의 식당 등 사회 문화 시설 내에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과 공간이 매우 많이 구비되어 있다. 단순히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구비해 놓은 정도라기 보다는 환영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일례로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안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주문할 경우 키즈 메뉴가 1개 무료로 제공된다.아동 관람객에 대한 갤러리의 시선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셋째는, 이와 같은 노 키즈존을 보는 사회 전체의 시선에 있다.
유럽에도 분명 노 키즈존은 존재하지만... 독일에서는 이와 같은 차별은 결국 아이가 아닌 그 주양육자이기도 한 부모들을 향한다는 점, 그리고 연령 차별 금지 위반으로 소송에도 걸릴 가능성 또한 있기에 직접적인 차별을 의미하는 이와 같은 표식을 꺼리는 분위기가 더 지배적이다. 또한, 인구가 감소 추세 선상에 동일하게 있는 독일의 경우 아동 친화적이지 않은 정책에 대해서는 이를 대하는 언론이나 정치인들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기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사회적으로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부분은 미국 내의 노 키즈존을 바라보고 이를 대하는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과도 매우 일치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발생시키는 소음에 대한 인내심과 이해심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더 낮은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모든 '노 키즈존 겨울왕국 영화관' 요청에 대한 이유가 아닐까.
아이가 함께 있음으로 인해 발생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들은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일견 이해가 갈 수 있는 부분들인 경우가 많다. 그건, 아이를 잉태하고 낳았다는 생물학적인 접점 때문이 아니라, 아이를 키워야 하는 과정 속에서 어른과 매우 다른 [아이]라는 새로운 개체에 대한 학습 시간이 길었기 때문으로 보는 편이 더 맞을 듯하다. 한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갑자기 밤에 자꾸 깨고 우는 시간이 이어지면 처음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라면 "우리 아이 왜 이렇죠?"라는 질문을 쏟아내지만, 이미 육아 경험이 있는 부모들이라면 '이가 날 때가 되어서 그러려니...'라며 아이의 잇몸을 먼저 체크해 본다. 이것은 이미 쌓인 '경험과 지식'이 같은 상황에 대한 '이해력'을 높인 예라 할 수 있다. 즉, 아이와 함께 쌓인 시간만큼 우리는 이 존재가 가진 특징을 이해하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나가게 되는 셈. 또한, 그 시간 속에서만 알 수 있는 '아이'라는 존재의 사랑스러움은 힘들거나 불편한 상황에 대한 인내 치를 높여가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거꾸로 말하자면, 같은 상황에 대해서 이해력이 떨어질 경우 이에 대한 수용을 넘어 인내심까지 기대하기에는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성인들이 상대적으로 유소아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지금 한국의 성인들 중 성인이 된 이후의 시간을 통틀어, 4~8세 정도의 영유아의 생활과 습성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이해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특히, 결혼하지 않고 부모가 되지 않은 성인이라면 얼마나 될까?
아래의 차트에서 2020년 현재 30대로 볼 수 있는 1987년의 출생률은 1.53명. 간단히 말해 현재 30대들의 경우 자라면서 자기보다 어린 형제를 볼 경우가 출생률 4.5명인 1970년대 생에 비해서는 현격히 적었다는 이야기인 셈. 또한, 형제가 있더라도 대부분 2-3살 정도의 차이가 대부분인 경우를 고려해 볼 때, 1.53명의 출산율 내에서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은 비슷한 세대를 지나며 함께 '성장'하지 형제의 '양육'을 부모를 도와할 경우는 크게 없을 듯하다.
그럼, 같은 가족 내에서 아이를 볼 기회가 청소년기에 없었다면, 10대를 지나 20대가 되어 주변에서 아주 어린 아기나 아이들을 마주할 기회가 많았을까? 그렇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 20대-30대의 삶 속에 '아이'를 가까이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적다. 삶의 과정에 '아이'를 이해해야 하는 필요는 없었고, 어느 순간 결혼하고 부모가 되어 그제야 아이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성인들이다. 형제나 자매의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 간접 육아를 경험해 본 사람들의 숫자 역시 합계 출산율의 저하와 함께 가파르게 낮아지고 있다.
아이는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금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
때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울기도 한다는 것.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이를 행동에 반영할 수 있는 정도가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생각보다 훨씬 자주 먹고 자주 화장실에 가거나 기저귀를 갈아줘야 한다는 것.
백일이 조금 지난 아이를 데리고 움직이려면 엄청난 짐가방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들 역시도 부모역할이 처음일 것이라는 것도.
... 이렇게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이런 [부모가 되어야 알게 되는 아이에 대한 진실이자 사실들]을 과거 결혼 이전의 나 역시 경험할 수 있는 경로가 딱히 없었다. TV 육아 예능 속의 아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데, 왜 현실 속에 마주하는 아이들이 때로는 '정신없고, 산만한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아이들의 모습은 결국 더 거슬려 보이는 쪽의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에 있을 것이라는 아주 막연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었다.
모든 곳에 아이들이 있었다.
어른이 가는 모든 공간에 아이들이 있었다. 어른들이 즐기는 문화에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함께 존재했다. 어른이 즐거운 곳이라면 아이도 함께 머물며 가정 내 아이가 없는 어른들도 아이의 습성을, 아이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곁에서 지켜보며 이해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한국에서 노 키즈존이 가장 많이 확산되고 있는 업종 중 하나인 '식당'의 예를 들어 미국과 한국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음식이 나오기까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잇거리
미국의 식당 중 꽤 많은 수의 레스토랑들이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의 식사를 도와주는 간단한 툴들을 구비해두고 있다. 색칠공부와 색연필, 또는 퍼즐과 같은 작은 장난감 거리들로 아이들이 음식이 나오기까지 아이들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배려심 돋는 키즈 메뉴
어른만큼 1인분의 양을 소화가 불가능하고, 맵고 짠 음식을 먹기 힘든 아이들을 위한 KIDS MENUE(키즈 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한국에서 아동을 동반한 가족이 오면, 음식을 차지하는 인원수대로 주문을 하지는 않고 나가기 때문에 영업이익에 문제가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 이유가 아이 동반 가족이 아예 식사를 하지 못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면, 바로 이런 키즈 메뉴 제공이 해결의 접점이 되지는 않을까?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서비스와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을 만난 적 있었다. 바로 PF.CHANG이라는 미국계 중식 레스토랑의 한국 지사 체인 매장이었는데, 이 작은 배려 덕분에 한국에서 우리는 아이와 함께 외식을 하는 날이면 그 식당을 매우 자주 가게 되었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사와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매우 생경했던 이런 부분들이 그 레스토랑만의 특징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는 '아이'에 대해서 있을 수 있는 배려라는 것을.
완연한 성인이 되기 전에도 이웃의 아이들을 돌보며 높아지는 아이에 대한 감내도
이렇게 일반적인 어른들이 함께 하는 공간 내에 '아이'들이 더 잘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구조적인 배려가 존재하는 것과 동시에, 미국과 유럽을 통칭하는 서양 문화권에서는 시간제 아르바이트와 같은 '베이비시터' 경험을 통해서도 성장하는 과정 내 영유아를 곁에서 볼 수 있는 기회들이 존재한다. 현재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지역의 엄마들 커뮤니티나, 지역 정보 사이트 등을 보면 심심치 않게 이런 글들이 올라온다.
"안녕하세요, 저는 8D에 살고 있는 크리스티나라고 합니다. 최근 일을 그만두고 학교로 다시 공부하기 위해서 돌아갈 예정인데, 그 사이 비는 기간에 약간의 수입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약 1달 정도 시간이 여유로우니, 베이비시터가 필요하신 경우 연락 주세요. 과거 베이비시터 일을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XXX이 번호로 문자 주세요. 6월 17일~7월 14일 내 주말, 주중 언제든 가능해요. 감사합니다. "
위와 같이 본인이 베이비시터 일을 구하는 중이라는 글 외에도, 대학교 방학을 맞은 본인 자녀를 베이비시터로 써달라는 글, 이제 중학생 또는 고등학생인 본인의 자녀들이 베이비시터 자격증을 이수했으니 필요하면 연락 달라는 글 들도 꽤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모두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대학 입학시점부터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한 성인으로 간주되기에, 성장 과정에서 각종 경제활동을 통해서 '돈'의 가치를 직접 몸으로 익히는 것을 많은 부모들이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러 학창 시절 다양한 아르바이트들을 경험해 보도록 하는 부모들도 많은데, 이런 경우 청소년이나 대학 초년생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경험해 보는 일이 바로 옆집의 아이를 돌보는 일이 되고는 한다. 이런 삶의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본인의 가정을 꾸리기 전에도 아이들을 돌보는 경험을 가지게 되고, 이를 통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흐릿해진 본인들의 아동기의 습성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사회는 구성원 모두가 '아이들'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2029년으로 예상되었던 대한민국의 인구 데드 크로스(dead cross: 사망자 숫자가 신생아 숫자보다 많아지는 시점)는 10년이나 당겨져 이미 2019년에 그 수치에 다다랐다. 정부는 출산율을 높이는 정책을 한다고 하지만, 시내 곳곳과 여행지 곳곳에는 "No kids zone"을 써붙인 카페와 음식점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아이들 수는 적어지는데, 그 아이들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은 또 더 적어진다.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엄마들의 모임에서는 어디든 갈 때마다 노 키즈존이 점점 늘어나 이제는 아이를 대동한다면 방문하기 전에 노 키즈존인지 예스 키즈존인지 확인을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대중교통이나 공원 등에서도 아이의 행동으로 인해 비난의 눈길을 받을까 아이를 더 엄하게 혼내고 우는 아이 입을 틀어막았다는 글들이 올라온다. 아이와 함께 하는 부모들은 '맘충'과 같은 혐오 섞인 단어를 마주하며 위축되고, 육아에 관련된 단어들은 '차별' '힘들다' '지치다'로 이루어지고.... 이는 고스란히 매체를 통해 더 크고 더 강하게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또한 인생 처음으로, 단지 '아이'를 낳은 부모가 되었다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됨을 알게 된 사람들의 부정적인 경험은 긍정적인 경험보다 더 빨리, 더 넓게 퍼져간다. 늘 칭찬보다 험담이 더 빨리 내 귀에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아이를 데리고 하는 외출에 더 움츠러드는 주변인을 보는 기혼이지만 아이를 낳지 않은 어른들은 어떻게 이를 바라볼까? 과연 이런 모습을 마주하며 아이를 낳고 키우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게 될까?
이 모든 상황의 결과는...
"No kids zone"이라 써붙인 식당과 레스토랑의 주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공간 안에 머무는 것을 정당화하는 어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무질서하게 돌아다니거나 시끄럽게 하는 행위로 영업에 방해가 되고 사고가 생길 수 있는 것은 물론, 다른 이용자들의 편의를 저해하기 때문]이라고. 처음에는 생경했던 "노 키즈존"이라는 신조어는 이제는 유행처럼 번져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노 키즈존을 환영하고, 일부 부모들 사이에서조차 '나도 아이가 있는 부모지만... 이해가 가기도 해요'라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노 키즈존의 반대급부로 예스키즈존도 생겨났다. 작은 나라인데, 아이가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은 이제 그 나라를 또 나누어 각각의 공간으로 더 나뉘어 모인다.
행위에 대한 차별이 아닌 존재에 대한 부정이나 긍정 모두 '해서는 안될 일'이다.
수많은 과거의 역사 속에 이런 '존재'에 대한 차별의 기록이 남아 있다.
학교에서도 배웠다. 조선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징집당하고 착취당하던 일제 시대가 우리 근대사에 남아 있고.
세계사를 펼쳐 보아도 나치의 유태인 탄압과 같은 매우 직접적인 사례가 수도 없이 말해준다.
지나친 비약이라 이야기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치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시작은 처음부터 수용소가 아니었다. 바로. 실질적인 학살 이전에 아주 점진적이고도 무섭게 사회 전체에 퍼져나간 유태인에 대한 '혐오'의 정서였다. 유태인이 하는 사업체를 보이콧한다던가, 유태인인 변호사는 법정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해지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유태인'이라는 민족 자체를 싫어하고 혐오하는 독일 아리아인들의 정서가 기초가 되었다. 나치가 퍼뜨리고 강화한 유태인에 대한 [혐오]의 정서는 사회 내에 암묵적인 차별과 학대를 일반인들 사이에도 정당하게 받아들이게끔 한 것은 물론, 이와 같은 일반 민중의 반응을 발판으로 더 힘을 얻은 각종 규제 법안들이 의회를 통과하여 실질적인 차별과 학대에 불을 붙였다.
내가(독일 아리안 민족) 누려야 할 나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고 나의 삶을 방해하는 존재(유태인)들에 대한 차별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비용을 지불하고 이 공간에 들어온 내가 누려야 할 조용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권리를 빼앗고, 나의 집중에 방해가 되는 아이들의 입장을 막는 No kids zone의 운영은 당연하다.
나치의 입장과. 노 키즈존을 찬성하는 아래의 말이 나는 아주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일반화되고 있는 아동과 양육자에 대한 혐오의 정서
시작은 분명 하나 둘, 걸리기 시작한 노 키즈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양육자에 대한 직접적인 혐오를 담은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고 아이와 관련된 사회문제에 크게 상관이 없었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엄마를 벌레와 같이 칭하는 단어와, 노 키즈존의 찬반 논란은 낯설지 않은 그 무엇이 되었다. 그리고 노 키즈존의 경우 이를 보도하는 매체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녀를 통제하지 않는 부모들이 많고", "66.1%가 노 키즈존에 찬성한다""자녀를 둔 기혼자 2명 중 1명 꼴인 54.8%의 응답자도 노 키즈존에 찬성 의사를 밝혀" (출처 중앙일보 2019.6.12 기사] [ONE SHOT] 노 키즈 존, 고객 ‘권리다’ vs ‘차별이다’… 당신의 생각은? )
앞서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노 키즈존'을 허용하는 정책이나 문화가 더 확산되지 않는 이유는 노 키즈존을 지지하는 입장이 사회적으로 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런데 사례로 언급한 위의 기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미디어들이 노 키즈존을 바라보고 다루는 시선은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논란이 있고 찬성은 이런 이유, 반대는 이런 이유다.]로 가치판단을 보류한 중립에 가깝다. 그 결과... 결국, 이를 통해 노 키즈존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닌, [있을 수도 있는 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에 더 가까워지고 말았다. 싹을 틔우기 전에 잘라내야 했던 아동과 양육자에 대한 혐오의 정서는 어느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의 밭에 존재의 뿌리를 내렸고,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자리를 넓혀나가 '원래 있던 것 아닌가'라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매우 후회된다. 어쩌면, 노 키즈존이 하나 둘 퍼져나가기 시작하던 그 순간에 우리는 한번 돌아봤어야 했다. 이를 찬성하고 지지하는 입장의 이야기와, 이에 대한 반대를 이야기하는 논쟁이 매체들을 타고 퍼져나갈 때... 이것은 찬성과 반대를 이야기할 류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저 애초에 그래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고 외쳤어야 했다.
세계 2차 대전을 다룬 다큐멘터리 World War 2 in Color 중 전쟁 후반부를 다루는 9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후에 소련과 연합군에 의해 유태인 강제 수용소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지고... 수용소와 같은 지역에 거주했던 독일 주민들이 참회의 의미로 현장을 순회하며 잘못을 뉘우친다. 그리고 군대와 관련이 없던 독일의 일반 주민들은 말했다. "안되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설이 우리 마을에 있는 줄 몰랐어요..." 하지만, 그 수용소에 있던 유태인들을 말한다. "몰랐을 리가.. 없죠.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마을을 지나 이 곳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시체를 태우는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았죠. 어떻게... 몰랐을까요. 그들은 그저, 방관했을 뿐이에요."
우리는 몰랐다고 이야기했던 독일 일반 국민들이라고 나치의 만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 노 키즈존과 아이와 양육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정서를 '방임'하고 '방조'하는 사람들 역시도 앞으로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짊어지게 될 것이다. 또한, 대상을 가릴 줄 모르는 '존재에 대한 혐오'의 정서는 , 그다음 타깃을 기다릴 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사회는. 어른도 지켜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아이였다. 본인이 지나온 일생의 지난 과정을 똑같이 지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성인이라면 과연 무엇을 이해하고 감내하는 것이 가능할까? 과연 그 사회에 비전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회의 대다수가 아이와 함께하는 문화를 지지하느냐, 아니면 아이가 함께 하지 않는 문화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비슷한 상황 속 아이들에 대한 사회 내의 대응 방식은 참으로 달랐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우리 사회의 모습은 씁쓸함을 넘어 참담했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사회 정의'에 대해서 '모든 이에게 동등한 기본적 자유를 완벽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최소 수혜자, 즉 사회적 약자들의 복지를 우선으로 배려해야 하며, 결과의 불평등은 존재할지언정 사회적 지위에 접근할 기회 자체는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사회적으로 합의한 절차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자유권, 행복 추구권, 평등권 등의 기본권을 '공정'하게 보장하는 것이 사회정의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볼 때, 사회적 약자 우대정책들은 이들이 처해있는 온갖 불리한 조건들까지 고려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 우리가 아이와 함께 있는 양육자에 대한 차별이나 비난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배려를 받아야 할 대상이지 먼저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사회적 약자라 볼 수 없는 일반적인 소비자의 편의를 먼저 고려한다는 것은, 사회 정의의 기본에도 위배된다.
고백하자면.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고, 이렇게 열렬히 노 키즈존에 대한 논의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 외치고 있는 나의 20대는, "왜 이렇게 아이들은 시끄럽고 정신없지.... 아 정말 애들 싫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어른이었다. 아이라는 존재를 '사랑'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는 그런 어른이었다.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자신이 없던 그런 어른이었다. 만삭으로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도 마트나 식당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아이들이 내가 아는 어린아이들의 전부였고, 그런 아이들을 보는 나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변화해 버린 한국의 현재를 만드는데 과거의 나 역시 일조를 한 것만 같아 그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어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알리고 싶었다.
나도 몰랐다고, 이렇게 작고 어리고, 아직 한참 이 사회를 배우는 중인 이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들인지. 어떤 어른이 흘겨보던 시선 내에 머문 소란스럽던 순간이 아닌, 그 외의 공간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이들이라고. 그러니, 따뜻한 시선으로 사랑해달라고 말이다.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성인인 우리도 함께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이대로 멀어지지 말아 달라고.
*존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해석은, "나는 뉴욕의 초보 검사입니다'의 이민규 작가님의 책 속 해석을 참고했습니다.
영국과 독일의 사례 조사에 협조해주신 안민영 님(인스타그램 아이디 @myahn24)과 철학하는 엄마로 잘 알려지신 a little teapot 이진민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https://brunch.co.kr/@jinmin111
유사한 내용을 다룬 c-program 플레이펀드 샌프란시스코 특파원 지수님의 글도 만나보세요:)
https://brunch.co.kr/@playwithaina/6
[미국의 KIDS BAN 관련 합법 여부를 다룬 기사]
https://lindleylawoffice.com/blog/2017/11/15/legal-ban-kids-from-restaurants/
[독일의 아동 동반 금지 레스토랑에 대한 기사]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9/2019032900193.html
https://news.joins.com/article/23564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