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포스트 아포칼립스] 매거진에 담기는 이야기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인 확산 속에서...피해를 가장 심각하게 입은 뉴욕에서 경험하게 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한 소설입니다.
"라일라, 오늘 3시 반에 아이린이랑 헤일리 발레 클래스 있는 것 알지?
난 이따 장 보러 갔다가 카이 데리고 놀이터에서 좀 놀다가 올 테니,
발레 학원에 늦지 않게 가고, 이따 집에서 봐."
아이가 셋, 그것도 웬만한 남자애들보다 더 극성스러운 딸 셋을 키우다 보면, 늘 정신의 20%는 어딘가에 두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마침 오늘은 수요일. 큰 아이와 작은아이의 애프터 스쿨 일정이 다르고, 저녁에는 손님도 오기로 하셨으니 모든 일정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라일라에게 한번 더 잔소리를 하고 돌아섰다.
보통 다른 곳에서 여행으로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을 대접해야 할 경우에는 최근 떠오르는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아이들 없이 어른들끼리의 저녁 식사를 즐기고는 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 사람들만은 꼭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나의 요리를 즐기고 싶다는 남편의 이야기에 귀찮지만, 마침 얼마 전에 새로 장만한 Bernadaud 식기를 자랑하기에 나쁘지 않은 기회라는 생각에 알겠다고 대답했던 차였다. 파스타볼과 디저트 플레이트, 그리고 큰 사이즈의 디너 플레이트까지 한 번에 차려내려면 무슨 메뉴를 해볼까... 고민하며 이제 막 점심 이유식을 다 먹은 막내 카이를 안아 올렸다.
존재 자체가 사랑인 이제 겨우 한 살 반인 카이는, 위의 두 언니들과 다르게 잘 울지도 보채지도 않는 아이다. 그저 늘 엄마인 나를 바라보며 한 번씩 조용히 웃어주어 '키우는 것 같지도 않다'는 말이 적격인 그런 아이라 키우는 것이 고생이 아니라 거꾸로 힐링이 되는 느낌. 작고 오동통한 팔을 살며시 구부려 이유식으로 범벅이 된 옷을 벗겨주는데도 울거나 짜증도 내지 않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연신 무어라 벙글벙글 이야기 중이었다.
"아옹, 에... 에... 아아아 앙. 음마"
"아~이 옷 좋아? 엄마 좋아? 오구구구구. 카이. 우리 마트 갈까?"
옷을 갈아입은 카이를 잠시 봐달라고 라일라에게 봐달라 부탁하고, 얼른 옷을 갈아입으러 아래층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아이를 낳은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고, 요즘 하루도 거르지 않은 요가 덕분에 출산 전의 체형으로 거의 돌아갔다. 덕분에 매일 옷 입는 재미에 푹 빠져있기에, 드레스룸에서의 시간은 늘 하루의 꿀 같은 시간이었다. 어제저녁에 택배로 막 도착한 닐리 로탄의 카키색 팬츠에 sold out인 아이템을 남편이 어렵게 구해준 보테가 베네타의 오렌지색 레더 슬라이드 슬리퍼를 신어보았다.
'신발 색이 좀 튀는 듯 하니 윗도리는 좀 톤을 낮추어야겠는데?'
마침, 바로 앞에 제임스 펄스의 검은색 긴팔 티셔츠가 눈에 띄었다.
'딱이군!'
카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마트로 향하기 시작했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마트로 가는 길은 늘 이 도시, 뉴욕의 면면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곳들이 가득했다.
오래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가득하고, 그 건물들마다 들어앉아 있는 커피가게며... 컬렉팅 샵들을 눈으로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늘 이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이 걸음걸음 일깨워지는 느낌.
어릴 때부터 지금의 남편을 만나 이 곳에 오기 전까지 살던 고향과 비교한다면, 정말 너무나 다른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이 곳의 매일을 너무나 사랑한다. 벌써 이 도시에 산 지 5년이 넘었는데도... 이렇게 계절이 바뀔 즈음의 사각거리는 공기를 마주하며 걷는 걸음은, 지금의 매일이 얼마나 꿈꾸던 하루였는지를 되새기게 해주고는 했다.
뉴욕에서 비행기로도 3시간이나 걸리던 고향은, 모두가 모두를 아는... 그래서 별다른 특별한 삶의 방식을 생각하기에도 어려운 그런 곳이었다. 거기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큰 도시에 가서 꿈을 이루겠다던지 화려한 대도시에서 살아보겠다던지.. 하는 꿈과는 거리가 먼 평범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중산층 가정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녀였다. 한 가지 좀 남들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늘 자신을 가꾸는데 엄격하던 엄마 덕분에, 주변의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가벼운 몸과 마음을 가졌다는 정도일까.
그런데, 그렇던 삶이 달라진 것은 나보다는 훨씬 큰 꿈을 가진 지금의 남편을 만난 이후였다. 어쩌다 떠난 프랑스 여행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거짓말처럼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대학 졸업 후, 아마도 아빠의 상점에서 매니저를 하다, 고등학교 동창 누군가와 결혼하여 또 그 동네에서 살게 되었으리라.
그런 내가, 모두가 한 번은 와보고 싶어 하는 이 도시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고, 영화로나 보던 셀렙들을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고... 하는 상황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행운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 곳에서의 하루하루가, 매일매일이 새록새록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오고는 했다.
아직 겨울의 끝이지만, 햇살은 이미 봄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여몄던 쟈켓의 단추를 좀 풀어보았다.
"사라~! 오랜만:)"
태어나서부터 이 도시에서 자란 린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라 회사를 안 가는 날인지, 한가로이 유모차를 끌고 나온 그녀가 특유의 긴 팔을 휘익 저으며 날 부른다.
"잘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다... 애들은 매일 만나서 노는데, 정작 우리는 못 봤었네.."
"그러니까!"
"안 그래도 나 물어볼 게 있었어. 혹시 학교에서 별 얘기 없었어?"
"응? 무슨 얘기? "
"아니.. 어제 우리 회사 아시아 디렉터가 그쪽에서 지금 돌고 있는 바이러스 관련 보고를 하는데, 여기도 멀지 않은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근데.. 나는 아무 징후도 못 느끼겠어서... 학교에서도 별다른 이야기가 없고... 혹시 들은 거 있어?"
"아니..? 설마 여기까지 그러려고. 애들 학교는 봄방학이 원래 이번 주 금요일 시작인데 갑자기 3일 정도 당긴다고 하더라고. 바이러스 때문에 뭘 좀 준비한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원래 방학이 이 번 주였어서.. 난 별 생각 안 했지?"
그렇게 짧은 대화를 뒤로 하고, 장을 보고 공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돌아서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얼마 전 다른 도시로 이사 간 엘리의 문자였다.
너 그녀 알지? 그~줄리아니 와이프. 남편 친구한테 전해 받은 내용인데, 지인 중에 그 줄리아니 와이프랑 같이 점심을 먹은 사람이 있나 봐. 근데, 거기서 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 떠도는 바이러스에 대한 기저 조사 결과가 심상치 않나 봐. 곧 맨해튼 도심을 아예 봉쇄하는 방안도 검토 중 이래. 우린 이미 떠나와서 상관없지만... 내 친구들인 너희들한테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문자 했어.
'뭐지.. 이 찌라시 같은 문자는....?'
그런데,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이 문자를 보낸 사람이 엘리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엘리는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거기다 그녀의 남편은 꽤 잘 나가는 스타트업의 대표였다. 늘 진중하고 사려 깊은 스타일이라 다들 이 부부의 말이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고 해도 믿을태세였으니까.
'믿어야 해 말아야 해.... 이따가 장 보고 그렉에게 전화해봐야겠다.'
복잡한 머리로 들어선 마트에서 생과일과 야채를 집어 들고, 저녁 메뉴로 결정한 파스타에 맞는 생면을 사러 다음 섹션으로 이동하는데 마트 안의 공기가 무언가 미묘하게 평소와 매우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큰 실내 공간에 존재하기 마련인 약간의 웅웅 거리는 소음도, 사람들의 움직임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공기가 무겁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들어선 파스타 섹션에는 마치 처음부터 물건들이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페투치니, 라자냐.. 등 굵기의 종류에 상관없이 파스타 섹션 자체가 텅 비어 있는 황당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 다른 곳도 둘러보기 시작하니 파스타와 캔 음식... 그리고 치킨스톡 등 각종 장기 보관 가능한 소스류까지 남아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불안함에 옆 사람들이 집는 물건들을 따라 홀린 듯이 마구 장바구니에 넣고 계산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그렉이었다.
"지금 어디야?"
"나.. 지금 카이 데리고 장보고 있지. 오늘 손님 오시기로 했잖아."
"내 말 잘 들어. 사라. 지금 바로 집으로 가서 짐을 싸. 6시 비행기야. 시간이 없어..."
"비행기라니 무슨 말이야? 어디 가는데..? 응? "
"지금 당장 뉴욕을 떠나야 해. 바이러스 때문에 도시를 봉쇄할 거래. 무조건 나가야 해. 시간이 없어"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바로 마트를 나와 미친 듯이 유모를 밀며 달렸다.
우아하게 걸을때는 편안하기 그지없던 바닥이 얇은 슬리퍼는, 귀가 아프도록 따닥따닥 소리를 내 심장 대신 내주고 있었다.
'저녁 여섯 시 비행기라면... 지금부터 다섯 시간 후.
적어도 3시 반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할 테니...... 아무리 늦어도 2시에는 집에서 나서야 해... 그럼 짐 쌀 시간은 한시간 반...?'
얼마나 머물지러야 할지 모르는 여행을 위해,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은 막내까지 포함 다섯 식구의 짐을 쌀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시간이 없었다.
이야기는.
다음 주에 발행되는 2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