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희 Dec 02. 2023

애프터썬

사랑은 어떻게 끝나게 되는가.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어떤 사랑을 말할 것인지 밝혀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며 그 종류 또한 매우 다양하므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범위를 줄여놓을 필요가 있겠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랑은, 주면 받는 이가 있는 사랑이다. 발송하면 답을 받지 못한다 해도 상대가 수신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랑. 발신인과 수신인이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반드시 끝이 날 수밖에 없는 사랑이다.


사람은 늘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되면 발송할 이는 있어도 수신할 이가 남지 않게 된다. 사랑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죽음이라는 무지막지한 요소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기점으로 사랑은 후회로 변질된다.


"조금 더 잘해줄걸"


"더 사랑한다고 말할걸"


"더 많은 것들을 함께 해볼걸"


혹은


"그 사람을 만나지 말걸"


"주변의 조언대로 진작 헤어질걸"


"용서해 주지 말걸"


아빠, 캘럼은 딸, 소피에게 선크림을 발라주는 일을 빼먹는 법이 없다. 선크림의 효력이 떨어질 수 있는 시간까지 계산해가며 그녀가 태양빛에 그을리지 않도록 돕는다. 강렬한 태양이 소피를 태우지는 않을까, 소피의 흰 피부가 검게 물들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캘럼은 선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애프터썬'은 태양빛에 잔뜩 타버린 피부에 바르는 크림이다. 붉게 익고, 상처 입고, 연약해진 피부를 회복시키기 위해 바르는 것이다. 어른이 된 소피는 캘럼에게 애프터썬을 발라주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을 책망한다.


소피는 튀르키예의 아름다운 햇살을 만끽한다. 따뜻한 주황빛과 다정한 노란색이 여행 내내 그녀를 감싸 안는다.


캘럼은 시릴 만큼 푸르고 어두운 빛에 잠겨있다.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감싸맸던 깁스를 벗겨내려다 또다시 상처를 입고 만다. 상처 입지 않는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캘럼의 피는 온기를 품은 붉은색이 아니라 식어빠진 검푸른 색을 띤다.


캘럼과 소피는 각자의 최선을 다한다. 캘럼은 소피에게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캘럼의 어둠은 간혹 밖으로 새어 나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소피에게 가닿는 법은 없었다.


소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바를 다했다. 파도에 닿아 아름다운 빛을 내며 바스라지는 태양빛과 같은 시기가 소피를 마주하고 있었다. 캘럼의 곪아있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보듬지 못했으나, 그녀의 능력 밖 일이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캘럼의 인생도 끝을 맞이하게 되었고 수신인이 사라진 소피의 사랑은 후회가 되었다. 그렇게 자신만의 그을린 피부를 갖게 된 소피는 애프터썬을 바를 수 있을까.


후회로 남게 된 사랑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으면 추억이 된다.


점멸하는 점등 속 캘럼의 몸짓은 춤이었을까 몸부림이었을까. 캘럼은 자기 자신에게 줄 사랑까지 모두 소피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남은 이는 가버린 이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소피는 캘럼이 드러내지 않았던 모습을 떠올리려 애쓰지만, 목격한 적 없는 장면을 이제 와 알아낼 방법은 없다.


목도하지 못한 기억은 곱씹을수록 기이하게 몸을 부풀려 혈관을 막는다.


그날 소피에게 분명히 남은 것은, 소피가 볼 수 없는, 등에 남은, 선크림을 발라주던 캘럼의 따뜻한 손길일 것이다.


목격하지 못한, 사실인지 모를, 차갑고 어둡던, 흐릿한 기억이 아닌 어설프지만 다정했고, 투박했지만 따뜻했던, 선명히 남은 실제의 감촉을 담은 채 살아가길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