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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Jan 03. 2024

복권

가난하고 가난하며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하여 가난한데 가난함이 떠나가질 않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돈이 없다는 거죠. 단순히 돈이 없다는 것뿐이겠습니까. 돈이 필요한데 돈이 없다는 겁니다.


세상이 공정하다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이제는 나를 좀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


매번 복권을 살 때마다 읊조리는 생각입니다. 종교도 없는 놈이 이럴 때만 신을 들먹이다니 이렇게 불경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굽어보는 신이 있다면 가끔 이런 핑계라도 대며 안부를 묻고 얼굴이라도 비추는 걸 더 좋아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당첨을 바라며 복권을 사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간절하지도 않지만 건성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복권은 수학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대가로 내는 세금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다. 매번 이게 될 리가 없지 되기를 바라면 양심이 없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번만큼은 제발 이번만큼은 하는 절절한 심정으로 번호를 골라잡습니다.


어제도 복권을 샀습니다. 살아 숨 쉬는 게 힘들다 느껴지면 잠에 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이다 잠에 들면 꿈을 꾸게 되고, 꿈을 꾸면 복권을 삽니다.


누군가가 죽는 꿈, 다급하게 쫓기는 꿈, 최악의 상대와 다투다가 회심의 일격을 찔러 넣었으나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내 목을 조르는 꿈. 이러한 꿈들 속을 헤매다 눈을 뜨면 복권을 삽니다.


복권은 추첨일 다음 날에 사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복권은 꿈입니다. 가능성이 현저히 현저히 현저히히히히 우스울 정도로 낮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혹시나 당첨되면 그 무지막지한 돈뭉치를 어디에 사용하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쓰고 그리고 재고 문지르고 비벼대고 베고 자게 되는 꿈입니다.


오늘도 꿈을 꿨습니다. 한 해를 쪼개는 첫머리부터요. 물론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복권을 샀습니다. 그동안 사고 긁고 구기고 집어던지고 처박아 버린 무수히 많은 복권들. 이번에는 좀 다를까요. 올해는 좀 다를까요. 달라야만 하겠으나 다르리란 법은 없습니다.


그제는 친구를 만나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습니다. 돈이 행복의 전부를 책임지지 않는다고요.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과장도 하지 않았고 당시의 감정과 생각에 충실한 발언이었습니다만, 깨어난 내게 잠이 들었던 나는 무척이나 부끄럽게 느껴질 뿐입니다.


가난해도 부끄럽게는 살고 싶지 않아 더욱 가난해졌고 부끄러워졌습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외로워서 기뻐서 고통스러워서 행복해서 불행해서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서 우울해서 사랑해서 증오해서 그리워서 잊고 싶어서. 결과적으로는 성공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모든 이들로부터 관심과 사랑과 동경을 받기 위해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이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지독한 연애를 하기 위해 작가님, 작가님, 들으며 목을 빳빳이 펴고 거드름 피우기 위해 외국어로 쓰인 내 소개 글을 뭐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따라 써보며 음침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기 위해. 그러기 위해 오늘도 복권을 삽니다. 무척이나 우스운 꿈들을 입 안에 넣고 혀로 돌돌 굴려 가며, 핥고 씹고 빨아대며 한자씩. 깨어있는 나를 한 글자 한 글자 따와서는 잠을 자고 꿈을 꾸며 한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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