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점심으로 남편과 콩국수를 먹은 후 그림 한 장 그리고 베란다 봄맞이 정리에 들어갔다.
화분을 온통 다 내려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리를 끝내야 했던 날들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보다 더 먼 이야기가 되었다. 내 안에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라는 시간은 깊이 모를 소실점으로 변하여 검고 둥근 원들이 끊임없이 작아지면서 쌓이는 집합소로 변해갔다.
화분 하나를 내려놓고 곁에 있던 다른 화분 하나를 그 자리로 옮기면서 닦다 보니 일을 다 마쳤음에도 전혀 마친 기분이 아니다. 개운하지가 않다. 결국은 부분 부분 며칠에 걸쳐 정리하기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화분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니 벌써부터 허리가 뻐근하다.
순전히 개운하지 않은 마음, 일을 했으나 한 것 같지 않은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고 나 또한 내 스타일이에 맞춰 살아왔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 일에 어제의 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의 스타일 말이다. "누가 하라면 하겠니? 니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 누가 널 말리겠니?"
그러나 언제부턴가 괜한 독백까지 중얼거려가며 나의 스타일을 다독거리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기왕에 손댄 이 자리만 정리하기로 마음먹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베란다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미련스럽게 새벽부터 저녁 늦도록까지 때로는 식사 시간을 놓아버리면서라도 한꺼번에 정리하느라 기운 빼던 내가 검고 둥근 소실점 어디쯤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게, 그때도 내가 말했잖니. 한꺼번에 먹는 밥이 체한다고. 어쩌다 한 번 뒤집어서 전쟁통을 만들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쇠심줄 같은 고집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하더니 늦게나마 철이 들었나 보네. 철들자 망령이라는데 조심하셔."
한꺼번에 정리하고 나서 며칠씩 팔 다리 허리를 부르며 몸살을 앓곤 했었다.
"그래, 망령까지는 가지 않도록 할게."
벽과 창이 만나는 모서리는 버려도 좋을 컴퓨터 책상을 놓고 수납용으로 사용 중이다. 거기까지 손을 대려면 어쩔 수 없이 남편 손을 빌려야 한다. 남편은 지금 외출 중이니 컴퓨터 책상 하나 옮기자고 친구 만나러 간 남편을 부를 수는 없다. 몇 해 전만 해도 혼자서라도 다 끌어내고 난리 법석을 떨었을 내가 또 고개를 들려는 순간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구. 컴퓨터 책상은 나중에 나중에."
손대지 않기로 한 이 일이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또 주었다. 그 구석에 작은 거미가 분명 있을 텐데 말이다. 그 더 구석진 자리엔 지난 몇 개월 간 쌓인 고운 먼지에 혹 풀씨라도 떨어져 싹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베란다 정리가 내 힘에 부치는 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줄여야지. 한두 개씩 줄이는 일도 내가 할 일 중 하나다.
십여 년 전 4층에 사시던 할머니께서 행운목 화분 세 개를 모두 아파트 화단에 내놓으시며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누구든 갖다 잘 키워주면 좋겠어."
내게도 그런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진작에 도착했는지도 모른다. 못 본 척 외면하고 아직은 기운이 남아있디고 잘난 척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시간만큼 자연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시간이란 인간은 물론 세상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도 놀라지 않도록 늘 다독거리며 온다.
장미 허브가 늘어지다 못해 엎어져 뒹굴었다. 엊그제 남편이 우산을 가지고 돌아 나오다 걸려 허브 가지 하나를 부러뜨리고는 온갖 애교를 다 떨었다. 그 늘어진 가지 중 어린 가지 두 개를 잘라 화분에 꽂아두고 나머지 한 보따리는 쓰레기봉투로 직행했다. 남편이 알면 진작에 정리하지 않았던 마누라에게 마음 상해할지도 모른다.
손에서 장미 허브 냄새가 머리가 띵할 정도로 진동한다. 지나치게 빨리 자라는 모습도 은근하지 않은 잎의 향기도 내 취향에 맞는 식물은 아니라는 증거다.
여름이 다가오니 해가 높아졌다. 여름 해를 조금이라도 더 받을 수 있는 자리에 해 좋아하는 아이들을 앉혔다. 구아버, 차이브, 군자란, 칼랑코에, 만데빌라 ...... 토마토가 모종 내 달라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중이지만 이번 주말이나 지나야 시간이 나겠다.
쓸고 닦고 또 쓸고 닦고 하면서 오후 내내 겨우 한구석을 정리했을 뿐이다. 그나마 컴퓨터 책상이 놓여 있는 자리는 상판만 닦고 말았다. 그럼에도 마음은 처음 대강 해치웠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상쾌하다. 내 스타일에 완전 맞춘 것은 아니라도 부분적으로는 가까이 갔기 때문이리라.
컴퓨터 앞에 앉아 조금 전 정리한 자리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요까짓 거 정리해 놓고도 정리했다고 하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치지는 말아야지. 힘에 부치는 일에 욕심부려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야지. 화초 하나 키우지 않아도 건강하게 잘만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머지는 며칠 있다 또 나눠서 정리해야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지내야지. 마음을 하나씩 내려놓으니 편해진다고 말은 하면서도 결국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나와의 대화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여러 가지 일에 나이 제한을 두는 이유를 한 살 두 살 더 먹으면서 알아가는 중이다. 마음은 이팔 청춘에 나는 열일곱 살이며 낭랑 18세요 열아홉 순정이라지만 오늘 내 몸 속 나이테는 먼 소실점으로 남은 과거를 떠올려보는 데서 족할 뿐이다
몸이 나이를 말해준다. 누구도 몸의 나이테는 숨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