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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아버에게서 배운다

꽃들이 말을 하다

by 장미

드디어 구아버가 꽃을 열었다.


어제 엄마 아버지께 묘소에 다녀온 후 큰 화분 자리를 정리했다. 깔라만시를 분갈이할 때 그 곁에 있던 구아버 꽃송이들이 몇 개씩이나 떨어져 나갔다. 꽃이 떨어져 나갈 때 가슴이 아린 건 어느 정도 면역이 되긴 했다. 식물들도 더 건강하고 고운 열매를 위해 스스로 알아서 솎아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웃 깔라만시 분갈이 때문에 그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꽃을 떨구게 된 구아버 꽃은 안타깝기만 하다.


오늘 아침에 보니 어린 구아버 가지 하나가 묵은 가지에 기대어 겨우 매달려 있다. 까딱 잘못하면 완전히 잘려나갈지도 모른다. 이런 때는 힘을 빼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필요 없는 힘이 조금이라도 더 들어갔다가는 어린 가지가 완전히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가지를 묵은 가지들 사이에 세우고 다치지 않을 정도로 빵끈을 이용해 고정시켰다. 힘을 빼느라 진땀이 났다. 후우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온 힘을 다한다는 것. 큰 힘이 필요할 때는 물론이지만 이처럼 작은 일에도 온 힘을 기울여 힘을 빼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힘을 뺄 때도 힘을 들여야 할 때 이상으로 큰 기운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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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에도 구아버는 꽃봉오리를 몇 개 올려주기는 했다. 오래도록 꽃봉오리인 채 겨울을 맞더니 겨울 한가운데서 꽃이 피었다. 하지만 그 꽃들은 열매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열심히 붓질을 해 주었음에도 꽃 핀 지 이틀 지나면 떨어지곤 했다. 꽃봉오리를 올렸으나 꽃이 피어도 열매로 이어지기엔 무리가 있는 철이 었었나 보다. 구아버 꽃들이 베란다에 머무는 며칠 동안 구아버 꽃이 남긴 향기로 콧속은 삼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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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아버를 잘 키우는 이들은 씨앗부터 시작해도 두어 해 만에 꽃도 보고 열매를 얻기도 한다. 나는 구아버를 키운 지 삼 년째 되던 해 꽃을 본 적도 없이 열매 하나만 달랑 얻었던 적이 있다. 씨앗을 묻어두고 방치와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 이후 구아버는 키만 훌쩍훌쩍 자랐고 꽃은 보여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구아버는 새 순에서 꽃봉오리를 낸다는 말을 들은 이후 가을이면 줄기도 굵고 튼튼하게 할 겸 구아버 가지를 싹둑싹둑 잘라냈었다. 봄이 되어 새순이 자라면 거기서 꽃봉오리가 올라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구아버 씨앗을 구해 심은 지 7~8년은 족히 흘렀다. 열매는커녕 꽃 보기도 쉽지 않으니 건강에 좋다는 구아버 잎으로 차를 끓여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씨앗 발아 삼 년쯤에 열매 하나 보고 지난겨울 꽃 세 송이 본 것만도 행운이다. 키우지 않았더라면 구아버 꽃을 어디 가서 직접 보겠는가 말이다. 그나마 집이 남향이라 열대식물인 구아버가 얼어 죽지 않고 살아준 것만도 행운이다. 마지막 꽃이 떨어져 사라진 날 욕심을 완전히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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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올해, 봄이 가까운 어느 날부턴가 새순에서 분명히 새순과는 다른 둥근 것들이 여럿 올라오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면서 지난가을에 보았던 꽃봉오리와 같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새순은 하루 다르게 자라고 그 새순에 꽃봉오리가 오순도순 매달려 자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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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에든 때가 있다. 식물은 언제 자신이 꽃을 피울지, 열매로 이어질지 안달하지 않는다. 식물을 키우는 이가 오히려 꽃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는 동안 관심이 지나쳐 식물을 보내버리곤 한다. 대체로 수분 과잉 공급이다. 나 또한 아끼며 오래 키운 많은 식물들을 보내버린 경험이 적지 않다. 살다 보면 꽃도 필 것이고 더 살다 보면 열매도 맺는다는 것을 식물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꽃이 피지 않는다 해서 또 꽃이 피었다 해도 열매로까지 닿지 않는다 해서 식물이 아닌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게 꽃이었던 시기가 있었다면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이미 지나갔을 것이다. 내게 열매가 열렸던 적이 있었다면 이 또한 비슷한 시기에 함께 흘러갔으리라. 뭔가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고 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해서 내가 나 아닌 것은 아니다. 오늘의 이런 나를 나라고 규정한다.


바람이라면 아직 내게 꽃의 시기가 노루 꼬리만큼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구아버처럼 꽃도 올리고 운 좋으면 열매도 몇 개는 얻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다 하면서도 이런 바람 자체가 욕심임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욕심 내려놓는 방법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 해도 완전한 실천에는 이르지 못하리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늦되는 내게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일보다 더 큰 바람은 우리 딸들이 건강하고 마음에 품은 일 이루며 때맞춰 성장하고 발전해 가는 일이다. 기쁨이나 깨달음은 크고 먼 데 있지 않음을 구아버 꽃을 보며 새삼 새겨보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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