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1. 바다나라에 여섯 공주가 살았다 아주 오랜 옛날 바다나라에 여섯 공주가 살았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이 여섯 공주들에게 딱 하나 안타까운 점이라면 여섯 공주의 어머니인 왕비가 안 계시다는 것이었다. 왕비는 막내 공주를 낳은 지 한 달도 안 돼 세상을 떠났다. 여섯 공주는 지혜로운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 바다나라에는 무엇이든 풍족했다. 바다나라 왕은 깊은 바닷속은 물론 잘 다스렸으며, 바다 위에도 정원과 밭을 만들어 햇볕에서 잘 자라는 꽃과 건강에 좋은 채소를 가꾸도록 하였다. 산호초와 미역, 다시마, 김 등 온갖 식물이 자라는 바닷속은 환상 그 자체였다. 바다 위에서는 장미와 튤립, 해바라기, 민들레, 피튜니아 등 온갖 꽃들과 배추나 무, 양파, 고추, 상추, 가지, 호박, 오이 등 몸에 좋은 채소는 물론 사과, 감, 대추, 자두, 복숭아, 수박, 참외, 망고 등 온갖 맛난 과일을 키웠다. / 할머니는 공주들에게 일찍 세상을 떠난 왕비 이야기는 물론 옛날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솔로몬 왕 이야기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포수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는 소년 이야기,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이야기,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콩쥐팥쥐 이야기까지 할머니의 이야깃주머니는 열기만 하면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오는 마술 주머니였다. 공주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어머니인 왕비 이야기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였다. 인어공주 이야기는 공주 자신들의 삶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 공주들은 열다섯 살이 되면 땅나라에 다녀올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열다섯 살이 되기 전의 공주들은 헤엄을 치거나 바다 정원에서 꽃과 채소, 과일 등을 가꾸고 따 먹으며 지냈다. 열다섯 살이 되자 첫째 공주부터 차례로 땅나라에 다녀왔다. 다섯 언니 공주들이 들려주는 땅나라 이야기는 막내 공주에게는 밤을 새워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막내 공주는 가장 최근에 땅나라에 다녀온 다섯째 언니 이야기에 푹 빠졌다. 땅나라의 왕자님이 신붓감을 찾으러 여행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땅나라 왕자가 신붓감을 구하러 바다나라에까지 올 리는 없을 거라는 언니들의 말은 막내 공주를 슬프게 했다.
2. 왕자를 만나다 막내 공주가 열다섯 살이 되는 날이 한 달 남짓 남았을 무렵 바다 정원에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런 때 바다나라 사람들은 바다 깊숙한 곳에서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지냈다. 막내 공주를 비롯한 여섯 공주들도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바닷속에서 며칠을 지내야 했다. 산호초 사이를 헤엄치며 숨바꼭질도 하고 예쁜 십자수를 놓기도 하는 사이 폭풍우가 지나갔다. 언니 공주들은 폭풍이 지나간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며 노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막내 공주는 바다 정원과 밭을 거닐며 폭풍우에 쓰러진 식물들을 세워주고 화초들을 다듬었다. / 막내 공주가 자두나무 아래 풀더미를 치우려는 순간이었다. 처음 보는 옷차림을 한 세 남자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누워 있었고 조금 떨어진 참외 밭 근처에는 젊은 청년이 역시 정신을 잃고 참외 덩굴에 감긴 채 누워 있었다. 놀란 막내 공주는 언니들을 불렀다. 언니들이 말했다. "땅나라 사람들이다." / 땅나라 남자들은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저는 땅나라 왕자이옵니다. 배를 타고 유람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배는 다 부서지고 바다나라 왕궁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려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바다나라 왕은 신하들에게 땅나라 사람들을 잘 보살피도록 일렀다. 폭풍우를 만난 땅나라 사람들이 바다나라에 오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기도 했다. 바다나라 신하들은 땅나라 사람들이 다친 데는 없는지 살피고 돌보며 물고기 꼬리 모양의 신발을 나눠 주었다. 땅나라 사람들은 물고기 꼬리 신발을 신고 공주들과 바다나라를 구석구석 구경할 수 있었다.
3. 공주와 왕자 사랑에 빠지다 왕자는 특히 막내 공주와 바다 정원에 올라와 지내기를 즐겼다. 왕자가 막내 공주에게 말했다. "바다 끝에는 어떤 나라가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나라를 물려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는 여행을 극구 말리셨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조를 하고 바다 여행을 시작했답니다. 사실 신붓감을 찾을 목적도 있었답니다. 저녁이면 아름다운 노을 아래 아른거리는 바다 건너 나라에는 내가 찾는 신붓감이 꼭 있을 것 같았죠." 공주가 말했다. "왕자님께서 보고 싶으셨다는 바다 건너 나라란 바로 이 식물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말씀하신 것 같아요." / 왕자는 공주에게 땅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만 지금 바로 가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랍니다." "어렵더라도 알려주십시오.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를 다스릴 유일한 왕자입니다." 공주는 왕자를 위로하며 말했다. "왕자님, 죄송하지만 동풍이 불 때까지는 기다리셔야 합니다. 왕자님은 서풍이 불 때 서풍에 밀려 이곳까지 오셨거든요. 그러니 이제 동풍이 불어야 동풍을 타고 왕자님 나라가 있는 서쪽으로 가실 수 있답니다." 왕자가 조바심에 공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물었다. "서풍은 언제쯤 불어올까요?" "그건 기약할 수 없지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 막내 공주의 마음은 동풍이 영원히 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컸다. 동풍이 불어오면 왕자는 자신의 나라를 향해 떠날 것이고 공주는 왕자를 영영 볼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동풍이 부는 날이 올 것이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막내 공주와 왕자는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다. / 다섯 언니 공주들은 물론 할머니도 막내 공주의 사랑에 걱정이 많았다. 그것은 바다나라 사람과 땅나라 사람이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상어 마녀의 주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상어 마녀가 주술을 외우는 동안 바다나라 사람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상어의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피가 날 것 같은 목소리를 가진 상어 마녀는 특히 바다나라 여자들의 친절하고도 아름다운 목소리를 좋아해서 바다나라 여자가 땅나라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걸 좋아했다. 더구나 막내 공주의 목소리는 바다나라 가수도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상어 마녀는 막내 공주가 하루라도 빨리 왕자와 더 깊은 사랑에 빠지기를 바랐다.
4. 공주 목소리를 잃고 왕자와 결혼하다 왕자와 공주의 사랑은 바다나라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바다나라 왕은 막내 공주가 사랑을 하게 된 것은 기뻤지만 하필 땅나라 왕자와의 사랑이라니 막내 공주가 목소리를 잃을 것이 마음 아팠다. 하지만 아무리 공주라도 상어 마녀의 주술이 없이는 바다나라 사람과 땅나라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다나라 왕은 공주의 마음을 돌리려 달래도 보고 공주와 왕자를 서로 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러나 몸을 가둔다고 해서 사랑도 가둬지는 것은 아니다. 막내 공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말라가기 시작했다. / 왕이 막내 공주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물었다. "사랑하는 막내 공주야, 진정 네 아름다운 목소리를 상어 마녀에게 주면서까지 왕자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냐?" 막내 공주는 퀭해진 커다란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왕은 공주와 왕자의 결혼을 허락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상어 마녀의 주술과 함께 공주의 목소리가 상어 마녀의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지켜보며 왕과 할머니와 다섯 언니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공주와 왕자는 사랑을 위해서는 목소리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서로 손을 맞잡고 즐거워했다. / 막내 공주와 왕자는 많은 바다나라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과 동시에 왕자는 목소리를 잃은 막내 공주와 함께 바다나라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왕자는 이 아름다운 바다나라 신부를 땅나라 왕과 왕비에게 하루라도 빨리 보여드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 막내 공주와 왕자 사이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공주가 태어났다. 왕자와 공주는 아기 공주와 함께 바다 위로 올라와 동풍이 불기를 기다리며 노닐었다. 왕자는 자신이 저 먼 서쪽 나라에서 왔노라고 아기 공주에게 알려주었다.
5. 동풍을 타고 왕자의 나리에 도착하다 드디어 반달이 떠오를 무렵, 부드럽고 따스한 동풍이 볼에 닿았다. 서풍과 마찬가지로 동풍은 언제 불어올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불면 여러 날을 불었다. 용궁에서는 공주가 왕자 나라에 가지고 갈 선물을 준비하느라 매우 분주했다. 며칠 후 동풍은 조금 더 세게 그러나 부드럽게 불었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높이 떠서 왕자와 공주와 아기 공주의 땅나라 여행을 축하했다. 바다 정원에서 자란 아름드리나무로 만든 배에는 커다란 나뭇잎 돛을 달았다. 왕자와 공주와 아기 공주를 태운 배가 서쪽을 향해 출발했다. 왕자의 신하들과 바다나라에서 왕자의 나라에 보내는 선물을 가득 실은 배가 그 뒤를 따랐다. / 배는 동풍을 타고 순조롭게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바다나라의 바다 정원이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맑은 날이 더 많았지만 비가 오는 날도 있었고 바람이 몰아치는 날도 있었다. 왕자는 비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처음 여행을 떠났던 때에 비해 걱정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어여쁜 아내인 막내 공주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 공주까지 함께 타고 있으니 걱정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날의 밤과 낮을 거치는 동안 다행히도 배는 드디어 땅나라에 도착했다. / 왕자와 왕자의 신하들은 용궁에서 신었던 물고기 꼬리 신발을 벗고 배에서 내려 성큼성큼 땅 위를 걸어갔다. 하지만 공주와 아기 공주와 용궁에서 온 신하와 시녀들은 땅나라 사람들처럼 걸을 수가 없었다. 물고기 꼬리 신발을 신은 채 콩콩 뛰듯이 몇 걸음 걷다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 왕자는 공주와 아기 공주들을 신하들에게 부탁하고 먼저 왕과 왕비에게 달려가 무사히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런 다음 용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렸다. 왕과 왕비는 기쁨에 겨워 마차를 보내 공주와 아기 공주, 용궁에서 온 사람들과 물건들을 실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온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온 감옥의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6. 미래 나라 의사들에게 수술을 받다 며칠 후, 맑은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날개 달린 커다란 물체가 궁궐 잔디밭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흰 가운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그들은 여러 가지 기계와 물건들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바다나라에서 뭍으로 온 사람들이 땅나라에서도 다리를 편안히 쓸 수 있도록 수술을 하기 위해 특별히 초대받은 미래 나라 의사들이었다. 공주와 아기 공주의 수술을 시작으로 바다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미래 나라에서 온 의사들의 말에 따라 수술을 받았다. / 공주와 아기 공주의 하나로 붙어 있던 다리가 길고 늘씬한 두 다리로 재탄생했다. 뒤이어 많은 바다나라 사람들이 다리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다리에 알맞은 옷을 만들어 입고 그들의 발에 맞는 신발은 맞춰 신었다. 바다나라 사람들은 땅나라 사람들처럼 걷고 뛰며 잘 어울려 지낼 수 있게 되었다. / 동풍이 불 때마다 많은 바다나라 사람들은 사랑하는 바다나라 막내 공주와 아기 공주가 살고 있는 나라를 찾았다. 그리고 다리 수술을 받고 땅나라를 즐기며 지내다가 바다나라로 돌아가곤 하였다. 또한 서풍이 불 때면 왕자와 공주와 아기 공주는 물론 땅나라 많은 사람들은 물고기 꼬리 신발을 신고 바다나라를 찾았다. / 공주에게는 수술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목소리 복원 수술이었다. 목소리 복원 수술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미래 나라 의사들의 경고가 있었으나 공주는 개의치 않았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주는 목소리 복원 수술을 받는 동안 의식을 잃었다. 그때 공주는 하늘나라에 있는 어머니를 만났다. 공주를 낳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뜬 어머니였지만 공주는 어머니가 천사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공주야, 내 이쁜 아기 공주야. 걱정 말아라. 보다시피 엄마는 미래 나라에서 잘 지내고 있단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무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게 아니란다. 목소리를 잃고 사랑을 얻었듯, 의식을 잃고 헤매는 사이 엄마를 만나는구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는 데 며칠간 혼수상태가 오더라도 잘 참아내야 하지 않겠니?" / 막내 공주가 의식을 찾았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고 올 만큼 힘든 수술이었다. 목소리를 찾은 공주가 큰 기쁨을 늘씬한 두 다리로 춤을 추며 수어와 함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세상이 처음 생겼던 날처럼 바다나라와 땅나라, 미래 나라는 서로 힘을 합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여럿이 하나가 된 아름다운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