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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지난 지 한 달,
하짓날보다 더 긴 여름 하루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토요일인 오늘 아침,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일어났다. 아침 일찍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남편에게 차 한 잔, 빵 한쪽이라도 내놓기 위해서는 남편보다 30분은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 더우니 그냥 더 자라는 남편의 말은 감사하지만 간단하나마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일찍 일어난 탓에 시간이 삭은 고무줄처럼 늘어져 제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잊은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 지난 지가 한 달이 넘었다. 하짓날에 비해 최소 30분은 낮이 짧아졌을 터다. 그런데도 낮은 하짓날에 비해 훨씬 길게 느껴진다. 지루한 일과 마주할 때면 중학교 한자 시간에 배운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곤 한다. 앞으로 이십 여일만 견디면 언제 더웠었던가 할 이 무더위가 그만큼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갑자기 파괴된 일상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우려에다 확진자가 확산 일로에 있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잠시 잠시 우울함에 빠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 파괴된 일상이 오늘부터 미래까지 주욱 이어질 일상일 수도 있다.





기온이 더 오르기 전에 일찌감치 멸치볶음을 했다. 기름 두른 냄비에 호두와 아몬드를 볶다 해바라기씨를 넣은 후 바로 볶음용 멸치를 넣고 파삭하게 볶아 냈다. 다음으로 준비해 둔 꽈리고추를 볶으면서 소금을 반 스푼 넣어 간을 했다. 물기가 생기는 걸 방지하려면 볶음 요리에는 소금을 넣으면 좋다. 물론 간장으로 간을 맞췄을 때의 맛은 그 나름의 부드러운 맛이 있다.


그제와 어제 밖에서 땀을 많이 뺐으니 오늘은 실내 운동으로 스쾃과 의자에서 무릎 들기를 했다. 그래 봐야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참 긴 여름날이다. 인터넷을 켰다.


정치하는 이들의 말과 말이 맞물려 쇠사슬 끌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인터넷을 닫으려는데 꽤나 희망적인 소식이 눈에 띄었다. 이스라엘에서 코로나19 알약 백신을 개발하고 있으며 임상시험 대기 중이라는 소식이다. 그래, 과학자들이 이런 코로나 상황을 그냥 보고 있을 리만은 없지. 혼자 좋아하고 손뼉을 쳤다.


갑자기 이깟 무더위쯤이야 텃밭에서 풀 뽑던 한여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덥다는 말을 가능하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고 지내는 이 며칠 동안의 내게 주는 과학계의 선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 것이다. 더 좋은 선물을 주기 위해 책장을 살폈다.


책 한 권을 찾았다. 오래전 친구가 선물한 1980년 초판본 '유태인의 처세술'이다. 앞쪽 책날개에서 친구의 낯익은 필체가 적힌 메모지도 발견했다. 이미 읽고 또 읽었던 책은 오랜 세월에 손때까지 묻어 책장마다 갈색빛이 돈다. 종이는 나무에서 왔으니 나무에게로, 나무는 땅에서 왔으니 땅에게로 돌아가겠다는 역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짧은 글들이니 하루 한 챕터씩 읽어보기로 한다. 오늘은 아주 짧은 '어느 랍비의 유서'를 읽고 책을 덮었다.


코로나19 알약 백신 소식은 머릿속에 강 스파이크를 남겼지만 강한 기쁨 이상으로 빨리 밀려났다. 언젠가는 알약 백신이 개발될 테고 그때까지는 이 지루한 오늘을 잘 견디고 이겨야 한다.





문득 선풍기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없어선 안 될 바람 제조기인 선풍기 날개에 자잘한 먼지가 눈에 띈 것이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데는 단순한 일이 최고다. 안뜨기와 바깥뜨기만으로 이어가는 뜨개질이나 수놓기야말로 결과물도 만질 수 있고 뜨개질이나 수를 놓는 동안 온갖 상상이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취미요 일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눈에 이상이 생긴 이후로는 뜨개질과 수놓기를 접었다.


이참에 선풍기 날개 먼지를 닦기로 했다. 나 혼자 지내는 낮에는 거의 선풍기 바람으로만 지낸다. 하지만 밤 동안에는 에어컨을 제습으로 해 두는데도 나는 이불을 덮어야 하는데 남편은 두어 번 깨서 선풍기를 틀곤 한다. 그러는 동안 선풍기 날개에는 먼지가 쌓였을 터다.


선풍기 청소는 남편 담당이다. 남편이 선풍기를 얼렁뚱땅 분해하고 닦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오늘 이 더위에 일을 보고 온 남편에게 선풍기 날개에 먼지가 끼었다고 말하기에는 남편에게 왠지 미안할 것도 같고 나는 지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뭐든지 해야 할 판이다. 선풍기 중간 청소를 해 두면 남편도 좋아할 것에 틀림없다.


선풍기 커버를 분리하기 위해 이리저리 살폈다. 아래쪽에 앞뒤 커버를 결합하게 하는 플라스틱 핀 같은 게 있었다. 그걸 힘주어 당겼다. 그것만 당기면 앞뒤 커버가 금세 분리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 같지 않다. 결국 선풍기를 눕히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런 십자나사못으로 커버를 고정시켜 두었다. 선풍기를 세워둔 채 커버를 분리하고 날개에 붙어 있는 먼지만 닦아낼 셈으로 바닥에 아무것도 깔지 않고 시작한 일이 커지고 있었다. 십자드라이버가 필요했고 혹시 몰라 1자 드라이버까지 준비했다.


나사는 쉽게 풀렸다. 화장실로 들고 가 닦을 정도는 아니어서 커버도 날개도 물티슈 세 개로 마무리 지었다. 흰 물티슈가 한 장은 새까맣게, 또 한 장은 거무튀튀하게 변했으나 나머지 한 장은 거의 본래의 흰색이었다. 선풍기 커버 결합은 입맛 없는 날 식은 죽 먹기보다 쉬었음은 물론이다.


선풍기를 구입한 지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른다. 요즘도 하루 다르게 신형 선풍기들이 나오고 있을 테지만 신형 선풍기들은 어떤 게 있는지도 모르고 지낸다. 남편은 리모컨 갖춘 선풍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리모컨도 없는 나이 든 선풍기가 맘에 든다. 사람이 낡아 부속품이 하나라도 적어야 편하게 느껴지나 보다.





선풍기 날개 먼지를 닦고 났는데도 시계는 여전히 오전 11시 반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꽈리고추 멸치조림과 어제 담근 알배기 겉절이로 이른 점심을 먹으려는데 남편의 전화다.

"점심 먼저 먹어요. 여기서 식사하고 한 시간쯤 후에 출발합니다."


'덥다'라는 말처럼 '지루하다'라는 단어도 참아보기로 했다. 오늘도 어제처럼 제법 바람이 살랑거린다. 곧 이 더위도 물러갈 테고 일일여삼추처럼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여름 한낮도 물러가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젊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더라면 시간도 더 절약하면서 살지 않았을까 싶어지는 여름날이다. 매미 울음이 잠시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며칠간 울음으로 삶을 노래하는 매미에게는 이 여름이 일일여삼초와도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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