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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땀 한 땀, 땀으로 복을 짓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대서 다음날이다.


대서 다음날인데 바람이 이렇게 불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습하고 더운 바람이지만 불지 않는 것에 비하면 감지덕지였다. 창문은 물론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현관문 안쪽에 달아둔 방범 겸 방충문은 너무 믿으면 안 되지만 잠깐 환기 시에는 많은 도움이 된다. 안방 쪽으로 들어가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 아니겠지 싶어 모른 체했다. 같은 소리가 또 들렸다. 현관 쪽으로 고개를 내미니 웬 여자가 우리 집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집안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현관 밖 사람이 반가운 듯 얼굴에 환한 웃음을 보였다.


현관문을 열어두자마자 모르는 사람을 맞닥뜨릴 줄이야 싶기도 했고 여자이기에 망정이지 남자였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방범문 안쪽에 선 내가 의아해하며 약간 쌀쌀맞게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죄송한데요, 이것 좀 5호 집에 전해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그녀가 커다란 종이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네? 누구신데요?"

"아, 5호 집에 드리려고 반찬 좀 만들어 가지고 왔는데 사람이 없네요."

"전화를 해 보시죠."

"지금 전화를 안 받으세요."





우리 층 5호는 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시고 나이 든 아들이 혼자 기거한다. 그러니 복지관 등에서 반찬을 나눠주는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계실 때에 비하면 현재는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이웃이 되어 버린 점이 안타까웠다. 복지관에서 반찬을 나눠줄 정도가 된 이웃에게 나는 무심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셈이었다.


"무슨 반찬인데요, 마침 오늘 제가 냉장고 속속들이 물건들을 사다 쟀네요."

그녀의 쇼핑백에 음식물이 가득 들어 있다면 우리 냉장고에 보관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았다.

"장조림이에요. 냉장고에 안 넣으셔도 돼요. 그냥 여기 좀 선선한 데 두셨다 전해주세요."

"음식물인데 이 더운 날씨에 냉장고에 넣지 않으면 금세 상할 텐데요."

"괜찮아요, 제가 다시 올 시간이 없어서요."

"근데 누구세요? 누구신지 알아야 누가 가져왔더라고 전할 거 아닌가 해서요."

"아 네, 저는 이*숙입니다."

아니 나는 그녀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다. 무슨 복지관이라든가 무슨 봉사자라든가 하는 것을 알려달라는 뜻이었다.

"**교회에서 왔다고 하시면 알 거예요."

"아, 네. **교회에서요."


드디어 방범문을 열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커다란 종이 쇼핑백 안에는 죽집에서 자주 보는 크기의 플라스틱 반찬 통이 비닐봉지에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냉장고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종이 쇼핑백이 커서 겉만 보고 못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따가 5호 집 아저씨 오시면 전해 드릴게요."

"냉장고에 안 넣으셔도 되는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또래로 보이는 그녀가 내게 몇 번씩이나 허리를 숙이며 감사해했다.





그때가 오후 두 시경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5호 집 아저씨는 들어오는 기척이 없었다. 현관문을 닫았다. 냉장고에 넣어 뒀으니 늦은저녁에라도 전해 드리면 되겠지. 하지만 귀는 쫑긋 현관 밖을 향해 있었다. 그렇게 다섯 시가 넘어가고 저녁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드디어 5호 집 아저씨가 귀가한 모양이었다.재빨리 현관문을 열었다. 5호 집 아저씨가 아니었다. 단지 내 상가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아래층 5호 여자 주민이었다. 나를 본 그녀가 반색을 했다.

"아줌마 댁인가?"

"뭐가요? 5호 집 아저씬 줄 알고 열었어요."

"네, 지금 아저씨 혼자 계세요."

"어머, 여태 아저씨 들어오실 때만 기다렸는데. 누가 아저씨 드린다고 장조림을 만들어 오셨는데 안 계시다고 저한테 맡기고 가셨거든요."

"아이고, 아줌마 댁이 맞네."

"네?"

"장조림 찾으러 다니는 중이에요."

"장조림 찾으러?"

"네, 반찬 갖고 온 분이 내가 5호 라인에 산다는 것만 알고 내가 없으니 6호 집에 맡겼대요. 아줌마 댁은 생각도 못 하고 우리 층 6호 아줌마서부터 혹시 몰라 그 아래 집까지 찾아다녔지 뭐예요. 그러다 13층까지 왔어요."

"아, 그래요? 양이 많지 않아 냉장고에 넣어뒀어요. 어디 교회 다니세요?"

"**교회 다녀요."

일단 같은 교회다, 안심이다.

"그분 성함이 이...?"

"네, 이*숙씨."

그것도 맞다.





장조림을 맡기려는 이에게 누구냐고 물었지만 이름을 댔을 때는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이름과 교회가 아니었다면 아래층 주민에게 무엇을 믿고 반찬을 건넬 수 있겠는가 말이다. 상할세라 몇 시간이나마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던 반찬을 말이다. 냉장고에서 장조림 반찬통이 든 봉지를 꺼내 아래층 주민에게 건넸다.


"전 우리층 5호 아저씨께 드리는 반찬인 줄 알고 내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 뭐예요. 어쨌거나 귀를 현관 밖에까지 내 놓고 있길 잘했네요."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반찬이 많았다면 제가 맡을 수 없었을 거예요. 날씨가 더워 상하기라도 하면 제가 책임져야 할 테니 말이에요. 그리고 이*숙씨께 한 가지 전해 주세요. 다른 것도 아니고 음식을 맡았다 전해야 하는 일이라 누구냐고 캐물은 거 이해하시라구요."

"아이고 당연하죠. 고맙습니다. 경비실에 맡겨도 되는 걸 공연시리 여러 이웃에 번거로움을 드렸어요."

"그래도 주인을 찾았으니 다행이네요.'


주방에서 몇 가지 되지도 않는 저녁 반찬을 준비하는 동안 등줄기를 타고 땀이 지렁이처럼 흘러내렸다. 그것도 나 먹을 반찬을 만드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 입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이 더운 대서 다음 날 반찬을 만들어 전달한 누군가를 생각한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땀으로 복을 지으셨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에 비할 바 아닌 땀방울이 스민 진정한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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