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아침에 눈뜨면서 문득 '덥다'라는 말을 자제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오늘 아침은 여느 아침보다 더 더웠다. 이 시기가 되면 해마다 같은 경험을 한다. 숨쉬기 운동을 하고 있다고 느낄 뿐인데 손등 피부의 작은 주름 사이사이를 땀이 채우고 등에서는 커다란 지렁이 같은 땀이 흘러내린다.
감정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말은 말을 내뱉기 이전에 이미 그 감정이나 느낌이 충만할 만큼 가득 차 있다. 그 충만한 감정이나 느낌이 넘쳐흐르기 시작할 때 말이 되어 나온다. 그리고 말을 한 이후에는 그 감정과 느낌에 안팎이 흠뻑 젖게 마련이다. 보고 싶으면 보면 되고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된다. 자고 싶으면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면 된다. 욕구만 있고 해소할 도리가 없을 때가 문제다.
오늘 이 거리에서의 찜통더위처럼 말이다. 한동안 올여름 들어 가장 덥다는 말이 지속될 것이다. 바람 한 점이 없다.
올해는 32년 전에 비하면 초복이 빨리 들었다.
다음 주면 둘째 생일이다. 벌써 서른두 번째의 생일을 맞는다. 둘째를 낳은 며칠 후 초복이 찾아왔고 대서에 중복과 말복까지 덥다는 날들이 주욱 이어져 있었다. 요즘 똑똑한 젊은이들이 들으면 참 대책 없는 임신이구나 싶을 것이다. 그나마 장마가 끝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친정아버지께선 둘째도 딸을 낳았다고 발걸음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시면서도 친정어머니를 통하여 두 가지 주문을 넣으셨고 매일 확인하셨다. '선풍기 바람 쐬면 안 된다.' '삼칠일이 지날 때까지 씻으면 안 된다.' 친정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어서 찬물 한 그릇을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남편은 출산 시기에 맞춰 여름휴가를 잡았다. 남의 집에 세를 살 때였지만 부엌에서 불을 쓰기에는 더위가 지나치게 무르익은 시기여서 마당에 화덕을 놓고 가물치를 고고 잉어를 고았다. 친정어머니가 가르쳐 주었을 텐데도 가물치도 잉어도 난생처음 고아 보는 남편은 내게 그 국물들을 한 대접씩 권했다. 잘 곤 진국 같지 않고 왠지 가물치도 잉어도 슬쩍 냄새만 남기고 지나간 듯 비린 데다 양이 많아 단숨에 마실 수도 없었다.
가을에 낳은 첫째 때는 친정어머니가 호박 속에 꿀을 넣어 고아 주셨으니 첫째 때와 둘째 때 느끼는 맛의 차이가 극과 극이었다. 꿀 넣은 호박도 처음이었고 가물치와 잉어 곤 국물도 처음이어서 모두 그러려니 하면서 먹기는 했다. 하지만 '고다'라는 단어가 고기나 뼈 등을 푹 끓여내고 그 국물을 졸인다는 뜻이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론 남편의 어설픈 솜씨를 탓할 수 없어 그 정성을 배가 부르도록 열심히 마셨다. 친정어머니가 둘째도 딸을 낳았다고 서운해하시는 데 서운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어머니께 상처를 남겼다. 둘째까지 딸을 낳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그런 말 할 거면 엄마도 아버지도 다시는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 말라고 투정한 나를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모두 지나간 일이 되었다.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가 똑같이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절대로 할 수 없다고 고개를 휘휘 가로저을 것이다. 목욕을 못하니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아냈다. 수건은 금세 뜨뜻미지근해졌고 닦아도 닦는 게 아니었다. 몸에서 쉰 냄새가 났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도 쉽지 않았다. 아기에게 땀띠가 생기지 않도록 분가루를 하얗게 뿌려도 살이 접히는 부분마다 땀띠가 돋았다.
그때 처음 내 손 등을 자세히 그리고 오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무리 더워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손등의 살결을 따라 생긴 작은 주름들이 땀으로 불고 있었다. 강의 하류가 홍수에 범람하듯 내 손등은 땀의 범람이었다. 얼굴에서도 등에서도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고 흘러내렸다. 남편도 덩달아 선풍기 바람을 멀리해야 했다.
신생아는 그런 상황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털북숭이 신생아가 며칠 지나면서 털도 빠지고 뽀얗게 살이 올랐다. 숱도 많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보들보들 내 숨결에 날렸다. 외갓집에 가 있던 첫째가 동생을 보러 왔다. 첫째는 내 품에 안긴 둘째를 보더니 저도 엄마 젖을 먹겠다고 떼를 썼다. 기저귀를 채워달라고 보챘다. 동생을 본 첫째는 여섯 살이었지만 여섯 살은 아직 아기에 불과하기도 한 나이다. 두 딸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동안에는 더워도 덥다는 말을 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그때 순간순간 떠올랐다 사라지곤 하는 짐승을 보았다. 나는 인간이기 이전에 새끼를 두 배나 낳은 저 대자연 속의 한 어미에 불과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더위를 견디고 두 아이와 함께 건강하게 이 시기를 지나야 한다. 그렇게 나는 삼칠일인 21일을 목욕을 하지 않고 견뎠다. 삼칠일이 왜 중요한지 그 의미도 모른 채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잘 견뎠다. 드디어 나는 웅녀의 피를 이어받은 인내자임을 스스로에게 확인받은 것이다.
대책 없이 여름에 출산한 그 딸이 어느새 32번째 생일을 맞는다. 흰 가루분으로 떡칠을 해도 아기의 목과 겨드랑이, 팔꿈치 안쪽과 엉덩이, 오금 등에는 땀띠가 돋았다. 내 손등에 땀이 범람하는 것처럼 아기에게는 땀띠가 솟았다. 그 아기가 32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다.
어느 때보다 더운 생일이 될 것 같다. 코로나19는 수그러들기는커녕 변이 바이러스들까지 범람할 기세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족끼리 1박이라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접어야 할 듯하다. 큰 유행병 앞에서 나도 한 마디 해본다. 아들 둔 엄마가 하는 '어떤 아들인데.'와는 질적으로 다른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 낳아 키운 자식들인데, 입덧으로 두 아이 모두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는데. 낳고 나서는 삼복더위에 삼칠일 동안 목욕도 삼가고 젖을 물려 키운 자식들인데..."
둘째 생일을 앞두고 남편과 함께 둘째에게 다녀왔다.
평일인 데다 가겠다고 알리면 극구 말릴 것을 알기에 도착해서야 집 비번을 물었다. 과장님과 면담 중이라는 둘째가 에어컨 틀고 한숨 자고 가라고 알려왔다. 엊그제 신랑이 다녀갔으니 생일날 아침을 혼자 먹을 둘째를 위해 미역국과 전, 카레, 고기 등 몇 가지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청소기 한 번 돌려주고 분리수거도 대강 한 다음 카톡을 보냈다.
- 딸, 서운해하지 마세요. 얼굴도 보고 싶고 맛있는 것도 함께 먹고 싶지만 얼굴 안 보고 맛있는 것 따로 먹어도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에 걸리지 않는 게 엄마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미역국은 물 한 컵 부어 데워 먹고 모든 음식은 가능하면 전자레인지 사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네, 엄마.
- 더운 때 태어나서 삼복더위 잘 견디고 잘 자라줘서 고마워. 딸 사랑한다.
- 엄마, 낳아주셔서 고마워요. 조심해 올라가세요.
- 그래, 이번 생일은 중복과 중복되네. 엄마가 차려주지 못한 복날 음식도 챙겨 먹고 늘 건강하렴.
- 네, 엄마. 엄마도 좋은 걸로만 드세요. 사랑해요, 엄마. 더위 견디고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딸들은 엄마 땀 냄새를 좋아한다. 내가 텃밭에서 땀으로 절어 들어온 날 딸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엄마 냄새를 맡기 위해 안기곤 했다. 둘째를 낳고 삼칠일 동안 찌들었던 엄마의 땀 냄새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오늘 손등은 땀의 범람 직전이다. 숨만 쉬고 있는데도 온몸이 끈적거린다. 에어컨 바람은 물론 선풍기 바람도 싫어하던 내가 언제부턴가 에어컨 바람이든 선풍기 바람이든 시원한 바람이 없으면 여름을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눈뜨면서 문득 든 생각을 실천하려고 하루 동안 노력 중이다. '덥다.'라는 말을 무심코 뱉었다가 쓸어 담지는 못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덥다의 ㄷ발음에서 멈추게 되는 걸 발견한다.
더우면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가동하면 된다. 하지만 길을 걸을 때나 버스를 기다려야 할 때 등 더위를 물리칠 만한 어떤 방법도 없을 때의 나를 다스려 보기로 한다. 덥다는 말을 자제하다 보면 누군가에게 느낄 수 있는 싫다거나 소란스러움 같은 대체로 좋지 않은 감정까지도 절제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덥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더위가 가시는 것도 아니고 싫다거나 시끄럽다고 한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면 말을 절제하는 것이 불편한 느낌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불편한 그 느낌이 내 안팎을 다 적시게 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찰랑거리다 사라지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둘째를 낳은 무렵의 더위도 견딘 나를 돌아보면 요즘 온난화 영향으로 여름 기온이 많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덥다'라는 말 정도는 입 밖에 내지 않고도 지낼 수 있겠다. 한 보름 남짓 땀 좀 흘리며 보내고 나면 언제 푹푹 삶은 날씨를 견뎠는지 선선한 바람과 마주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