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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Jan 20. 2022

아침부터 쌀국수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함박눈보라 속을 달려 집안 고참 오라버니 댁에 다녀왔다. 


지난 1월 1일 오라버니 전화를 받고 가슴이 뜨끔했다. 우리 친정 부모님 살아계실 땐 명절이면 아무리 바빠도 집안에 마지막 남은 어르신이라며 찾아와 인사를 드리곤 했던 오라버니다. 오는 길처럼 가는 길도 순서가 정해져 있다면 '이제 내 차례다' 하시는 오라버니의 말씀이 맞다. 더 자주 안부 전화라도 드리고 찾아뵀어야 한다며 송구함을 전했지만 전화상으로만 끝낼 일은 아니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이렇게 심한 눈이 내릴 줄 알았더라면 약속을 이 날로 잡을 리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날씨가 좋았다면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대리를 부를 수밖에 없을 상황이 뻔했기 때문이다.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차도 나누면서 오래 못 찾아뵌 마음도 전하고 그 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집안사도 들으며 남편은 오랜 만에 처가 어른께 술도 한 잔 대접해 드리면서 한가한 시간을 즐길 참이었다. 이런 마음을 배반이라도 하듯 신나게 눈은 쏟아졌고 결국은 차를 끌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눈이 오니 차를 끌고온 걸 구실 삼아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오히려 더 잘 됐다 싶기도 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댁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다 대 봤다. 그러나 84세 오라버니의 호통 겸 사정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눈 속을 달려 오빠를 찾아 준 젊지 않은 동생을 어떻게 얼굴만 보고 돌려보낼 수 있단 말이냐, 너는 그럴 수 있느냐, 나는 우리 매제랑 술도 한 잔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좀 나눌 테니 동생은 언니랑 그렇게 시간을 좀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 음식점에 벌써 음식도 시켜 두었다......'


하고 많은 날 중에 궂은 날을 잡아 오게 돼서 죄송하다는 나와 남편에게 오라버니는 거듭 기분 좋은 말씀을 주셨다.

"무슨 소리냐. 누이야, 니가 복이다. 이렇게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우리 집에 와 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고맙다."

나는 또 철없이 굴어도 좋을 분위기를 금세 알아차리는 어린아이처럼 오라버니의 말씀에 환하게 답했다.

"정말요, 오빠? 오빠 말씀 들으니 기분 좋아지네요. 사실 코로나 이후 애들 집에 잠시 들르긴 했어요. 하지만 앉지도 않고 전할 것만 전한 다음 바로 돌아서 나왔거든요. 이렇게 앉아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2년 만에 오빠 댁이 처음이에요."

"오냐오냐, 그래. 잘 왔다. 고맙다."


결론은 12시 반부터 시작된 점심 식사 자리가 5시 10분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와인부터 시작하여 뽕주(?)와 양주에 소곡주, 무슨 무슨 꽃 술까지 크고 작은 술병이 등장하고 비워졌다. 오라버니는 집안일은 물론 과거나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거의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남편도 오라버니의 말씀에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동의할 정도로 세상을 살았다. 


84세의 연세에도 매일 2시간을 걸으시고 좋은 계절 맑은 날에는 공원 벤치에서 30분 이상은 책을 읽으신다는 말씀에 놀랐다.

"눈이 침침해서 이젠 돋보기 없이는 책을 읽을 수가 없구나. 그래도 2년 동안 책 40권은 읽었다. 특별히 가진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으니 죽을 때까지 책이라도 읽어 마음 건강만이라도 챙겨야잖겠냐?"





눈은 그쳤으나 남편은 거나하게 취했고 나는 장롱면허라 결국은 대리를 불렀다. 오라버니와 남편은 같은 양의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한 것 같은데 남편이 훨씬 더 취해 있었다. 오라버니 댁에 있는 거의 모든 술을 거덜 내는 것으로 모자라 미리 준비해 두셨던 담금주와 와인, 양주, 고향에서 보냈다는 김까지 손에 들려주셨다. 그리고 직접 내려오셔서 기사에게 눈 오는 날의 대리비에 조금 더 얹어 건네며 당부하셨다.

"우리 여동생 부부요. 집앞까지 안전하게 잘 모셔 드리세요. 부탁합니다."


남편은 주차장에서 세 번이나 미끄러졌다. 조금 더 얹어 받은 대리비와는 상관없이 대리기사는 취기 오른 남편을 도와주었을 것이다. 기사는 아파트 현관문 근처까지 남편을 부축해 주었다. 현관문을 열자 경비 아저씨께서 나오셔서 남편 어깨를 잡아 주셨다.

"좋은 일 있으셨나 봅니다. 많이 드셨네요."

"네, 매형이랑 한잔했습니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까 염려되어 두꺼운 겨울옷은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하고 꿀물에 꿀생강물을 타서 남편에게 건넸다. 토할까 걱정을 했으나 번잡한 일 없이 남편은 곤한 잠에 빠졌다. 운동을 못해 몸이 덜 피곤한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남편 걱정에 자주 깼다. 오전 약속이 있다는 남편을 위해 일찍 쌀국수를 끓였다. 오후 내내 술만 마시고 저녁식사까지 걸렀으니 피 대신 알코올이 흐르고 있을 몸에서는 곡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입과 뇌에서는 국물 외엔 손사래를 칠 것이 틀리없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식은 쌀국수를 건넸다. 멸치 다시에 쇠고기와 숙주, 버섯, 당근을 넣고 끓으면 쌀국수와 마늘을 넣고 한소끔 더 끓인 후 월명초 몇 잎을 넣어 푸른색을 곁들였다. 물론 남편은 국물만 홀짝홀짝 마셨을 뿐이다. 그럼데도 나는 여러 가지가 우러난 국물을 남편에게 권했다는 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순전히 내 식으로 내 멋대로 끓인 쌀국수가 술국으로 나쁘지는 않은 듯하다.





"누이야. 언제든 오빠한테 들러라. 우리 매제한테 잘 하고. 자식들이 부모 품을 떠나면 부부 둘밖에 없다. 그리고 매제, 우리 **한테 잘 하시겠지만 나이 들수록 더 잘 챙기시게. 우리 집안 여자들이 다 똑똑하다네. 그대로 따라 나쁠 것 전혀 없다네. 고맙네."


오라버니의 말과 행동 모두에서 친정아버지가 보였다. 딸인 내게는 남편에게 잘 하라시고 사위에게는 우리 딸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며 술 한 잔 권하시던 모습과 형제지간에 우애 좋게 지내라시던 말씀과 내 집에 온 사람을 어찌 그냥 보내느냐시던 모습과 손님이 돌아갈 때는 문밖까지 나와 거마비를 건네시던 아버지를 오라버니는 그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오라버니에게는 작은아버지인 우리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어도 좋겠다. 


"알겠어요, 오빠. 날 따뜻해지면 좋은 날 전화드리고 또 찾아뵐게요. 언니,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언니가 항상 너한테 고마워한다. 우리 첫째는 어려서 **고모처럼 살겠다고 노래를 불렀단다."


말씀만으로도 좋은 책 서너 권은 읽은 듯 뿌듯하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조카들 얼굴도 함께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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