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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님, 제발 이 옷 좀 입어주세요

by 장미

어제저녁 무렵 잠시 들르겠다던 첫째가 2시 반경 도착했다.

방금 우체국에 들러 둘째에게 몇 가지 반찬과 과일 등을 부치고 올라온 길이었다.


"웬일? 시간 없다더니."

"환할 때 들렀다 가려구요."

새 프로젝트 진행 때문에 바쁘다는 둥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다

코로나 19 때문에 지난 설 명절은 물론 추석 이후 몇 개월째 얼굴 못 본 둘째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잖아도 둘째 옷도 사 보내고 엄마 아빠 것도 사드리려고 일찍 온 거예요."

"엄마 아빤 건 됐고 둘째 거나 보러 가자."





몇 해 만에 둘째 옷을 첫째와 함께 고르러 갔다. 둘째는 옷이며 구두며 머리 모양새 등에 별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이 해야 할 일에 관심이 맞춰져 있다. 한 번은 세종에서 서울까지 엄마 보고 싶다며 퇴근하는 길로 올라왔던 적도 있다. 앞부리가 1/3은 나가 덜렁거리는 구두를 신고서 왔다. 사무실에서 살짝 넘어질 뻔해서 보니 구두 밑창이 떨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세종이라는 곳이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 편의점 외엔 극히 제한적이었던 때라 새 구두 사러 왔다 갔다 하느니 엄마에게 오는 게 더 간단하고 쉬웠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다. 둘째가 어려서는 일차로 내가 가서 옷을 봐 두고 이차로 첫째와 함께 가서 첫째가 입어보고 마음에 들면 약간 넉넉한 품으로 사다가 둘째에게 건넸다. 두말없이 둘째는 엄마와 언니가 고른 옷을 즐겁게 입고 다녔다. 옷을 고르고 구두를 고르는 시간이 아깝고 입어보고 신어보고 하는 그 행위가 귀찮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 둘째 같은 사람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과 자신의 외형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면 그에 맞는 색상과 사이즈의 옷을 바로 배달받을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매장을 한 바퀴 돌았다. 내가 일차로 돌아보는 과정이 생략되었으니 약간의 시간은 벌었다. 둘째가 자주 서울에 올라올 수 있었던 코로나 전 시절에는 두 딸이 서로 함께 옷을 골라주고 사주며 즐기기도 했었다. 코로나 이후 사소한 만남까지 모두 바뀌고 있으니 함께 옷을 고르러 다닌다는 일이 추억 같지 않은 추억이 되어 버렸다. 둘째가 입으면 괜찮을 것 같은 코트 사진을 찍어 보내고 색상도 모양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다음 코트 한 벌을 구입했다. 매장에서 바로 택배로 보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코트 보낼 때 다른 매장 셔츠 몇 벌 함께 보내줄 수 있는지 물어보자는 내게 첫째가 정색을 하며 말렸다. 그런 일은 매장 언니를 곤란하게 하는 민폐라나. 첫째가 자신의 코트를 고르는 사이 내가 물었다. 매장 언니가 오히려 더 반겼다.


"그럼요, 왜 안 되겠어요. 우리 물건을 사시지도 않으면서 우리 매장에서 보내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 것을 사셨는데 거기다 몇 가지 더 넣어 보내 드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리고 다른 매장에서 따로 택배 보내시면 일도 비용도 이중으로 들게 되니 저희가 감사하죠. "

물어보길 잘했다. 첫째도 놀랐다.

"전 민폐라고 엄마를 말렸는데... 고맙습니다. 엄마, 다른 건 나중에 고르고 둘째 것부터 빨리......."


셔츠 세 벌을 골라 코트와 함께 택배를 부탁했다. 첫째 것을 고르고 엄마 아빠는 옷 필요 없다고 금전으로 주는 게 훨씬 좋겠다고 농담 섞인 말을 하며 매장을 나섰다. 대낮처럼 불 밝힌 매장 내에선 시간 가는 줄 몰랐더니 겨울이라 벌써 어둠 내린 지 한참이다. 6시 20분.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고등어를 구웠다. 남편이 회를 사들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첫째와 함께 생선으로만 차려낸 밥상 앞에 마주 앉았다. 둘째도 둘째 사위도 함께였다면 더 화기애애했을 텐데 말이다.





첫째가 둘째에게 오늘 산 옷은 내일 택배 부치면 모레 도착할 거라고 톡을 보냈다. 둘째가 삐졌다. 언니 돈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언니 옷이나 사지 왜 동생 것을 사 보냈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첫째가 가격을 확 다운시켜 톡을 보냈다. 가격표에 붙은 가격에서 80 퍼센트 세일이라 산 거야. 돈 정말 거의 안 썼으니 걱정 마시고...... 옷 사 주고 입어달라고 사정하고 이런 언니가 세상에 어딨냐? 옷 입은 사진 반드시 보낼 것...... 둘째가 삐짐에서 돌아서면서 통화도 하고 엄마 아빠와도 목소리 교환하고 밥을 먹으면서 소란스러움을 즐겼다.


첫째가 이것저것 가져갈 물건들을 챙기고 카카오 택시를 불러 타고 돌아갔다. 자고 가고 싶지만 아침 일찍 약속된 일이 있어 죄송하다는 첫째를 배웅하고 들어와서 티브이 연속극을 보고 뉴스도 잠시 보았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연 순간 아뿔싸, 정작 중요한 건 안 보냈다. 양배추 찜과 참치 샐러드, 대파 송송 썰어 담아둔 봉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갈 때 꼭 주어야지, 갈 때 꼭 달라고 하라고 첫째에게 다짐까지 받아뒀건만 나도 첫째도 함께 들었던 남편도 모두 그것만은 쏙 빼놓고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남편에게 말하니 같은 서울이니 내일 갖다 주겠다고 한다. 바깥 현관 비번만 묻고 현관 손잡이에 걸어두고 오면 되겠다. 제 차가 있었으면 돌아와서 가져갔을 텐데 싶으니 중고차라도 한 대 구입할까 하는 딸을 말린 게 잘한 일인지 싶기도 하고 올해까지는 어쨌든 바쁜 나날을 보내야 할 딸이 차에까지 신경 쓸까 걱정하는 건 또 어미 마음이기도 하다.


날이 꾸무룩하다. 한 이틀 해가 반짝하는 날은 귀가 얼얼하도록 춥고 다음날은 흐리거나 눈이 오는 날의 반복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겨울이 왔듯 이런 과정을 거치며 겨울도 물러가겠다. 그 사이로 슬쩍 봄도 끼어들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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