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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재 Aug 02. 2021

다가올 날을 헤아릴 용기

<쓰기의 감각>, 앤 라모트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것은 내가 글쓰기에 대단한 재능이나 열정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어린 시절 칭찬을 받는 대부분의 이유가 '글솜씨'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어렸던 내게 쏟아지는 칭찬이 글쓰기 대신 '뛰어난 외모' 혹은 '유연성', '손재주' 같은 것들이었다면, 아마 나는 글쓰기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으로 자라났을 게 분명하다.


사실 글을 제법 쓴다는 것은 내 또래 아이에게, 압도적인 미모를 갖거나 전교에서 제일 뛰어난 축구 실력을 가진 것처럼 어느 '시절'을 뒤흔들 만한 능력은 아니었다. 미묘한 것들을 잘 알아차리거나, 사람이나 장면을 관찰하며 상상하는 능력은 대개 나를 더 생각 많고 고민 많은 아이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곤 나의 '생각 많음'이 또 다시 나의 새로운 고민거리가 되는 식이었다. 차라리 그 이해 받지 못한 공상들을 모두 모아 글로 쓰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가끔 고등부 공모전에 나가 상을 받고 쏠쏠한 상금을 챙기는 일만은 재미졌다. 조금의 노력을 들이고도 칭찬을 받고 성과를 내니까, 글쓰기를 만만하게 여겼던 듯도 싶다.


그러니까 그때는, 글쓰기가 나에게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구석'이 있음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글쓰기에 그 이상의 진지함은 갖추지 못한 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글쓰기와 나의 관계를 바꿔준 사건이 생겼으니, 아빠의 죽음이었다. 나도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라 황망해하는 동안 사람들의 위로가 쏟아졌고, 정작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부터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힘든 게 생기면 사람을 만나 푸는 내가, 멀쩡한 척을 할 수도 그렇다고 힘든 티를 내고 싶지도 않아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어쩔 수 없이 찾게 된 도피처가 글이었다. 하루에 두세 편씩 블로그에 쓰던 글들. 일을 하다가도 힘들면 노트북을 갖고 폰부스에 들어가 글을 짧게 썼고, 아빠가 보고 싶은 날에도 카페에 나가 아빠에게 편지를 썼고,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이 들어 한없이 서러워지는 밤이면 친구에게 카톡하고 전화하는 대신 블로그를 열어 글을 썼다.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이 블로그에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오직 '글로만' 교감하고 교류하는 경험을 하고 나자 내가 글이라는 수단을 가질 수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그 후로는 부지런히 썼던 것 같다. 일을 하며 들어오는 원고도 거절을 한 적이 한 번 없고,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작업도 마다 않고 했다. 과거에는 글을 쓰는 것이 나는 남들과 다름을 증명하기 위한 나름의 분투였다면, 지금의 글쓰기는 내가 나를 연민하는 방식이자, 나의 고통에 공감해줄 나와 다르지 않은 누군가를 찾기 위한 분투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내가 겪은 일들, 상처, 사람들을 소화하는 행위인 셈이고, 글을 통해 나는 나를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저자가 '당신이 좋아하고 기꺼이 응원하고 싶은 어떤 사람이 마치 당신 자신인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썼듯이. 나는 글을 쓰고 그 글 속 인물을 다정하게 바라봄으로써 상처 있는 나, 여러 경험을 겪은 나, 모자란 나를 비로소 더 응원하고 아끼게 되는 것이다.


하루키가 최근작 <고양이를 버리다>에서 이렇게 말한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잊을  없는, 그리고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전할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있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  역시  전하기 쉽지 않은 나의 무거운 체험들을,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 소화하는 중인  같다.


그렇게 글을 쓰다가, 혹은 글을 읽다가, 지극히 개인적으로 느껴지던 나의 경험과 아픔이 어떤 종류의 보편임을 알게 될 때. 나의 문제가 나만의 문제는 아님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었을 때. 그럴 때 적잖이 위로를 얻고, 다가올 날들을 가만히 헤아릴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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