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6 _ 가시압정벌레

by 선작

어제 나의 오랜 신체화 증상에 이름을 붙였다. 이름은 ‘가시압정벌레’다. 가시압정벌레의 활동은 내게 무기력과 두려움, 불안·초조함을 불러일으키는 몸 상태이며, 원인이 불분명하나 심리적 문제에서 촉발되는 것은 분명한 나의 오랜 신체화 증상이다. 알 수 없는 심리적 원인이 몸 상태를 바꾸고 그것이 내게 또 다른 심리적 어려움을 던져 주는, 정말 가져다 버리고 싶은 놈이다.


증상은 등줄기가 오싹하다는 표현 그대로 시작된다. 곧 등판 전체에 사포처럼 까끌까끌한 것이 붙어 있는 듯 잔잔한 불쾌감이 이어진다. 이 증상이 시작되면 곧바로 두통과 무기력이 따라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웅크리고만 있고 싶은 것이다. 이걸 떨쳐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릴스나 쇼츠같이 빠르고 자극적인 것을 보아서 감각을 잠시 잊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두세 배의 후속 증상을 동반하기에 좋은 방법은 아니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등 뒤에서 누군가 칼이나 총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공포심을 자극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이게 정말 죽을 맛이다.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고 그걸 머리로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극도의 불안한 감각 때문에 꼼짝도 못 하게 되는 거다.


다행히 몇 가지 조치를 하면 사그라지는 편이기에 주변인들 모르게 증상을 잘 처리하고 사는 중이다. 조치 첫 번째는 땀을 내는 것이다. 제자리 걷기를 하든 계단을 오르든 전력질주를 하든 몸을 움직여 땀을 낸다. 잠을 자는 것도 좋다. 컨디션이 회복되면 적어도 ‘공포심’은 사라지니까. 매우 바쁘게 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격무에서 오는 고통이 증상의 불쾌감을 덮는 인과를 쓴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쓸어 달라고 부탁하는 방법이 있다. 나이 먹은 여성의 등을 흔쾌히 쓸어 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아서, 그럴 땐 상상으로나마 돌아가신 할머니의 쓰다듬을 재현하며 증상을 가라앉히곤 했다. 사실 그게 제일 정석적이고 아름다운 방법이긴 했다. 가끔 아이가 ‘엄마 토닥토닥’하면서 등을 두드려 줄 때도 있는데, 어린이의 가장 든든한 보호자여야 할 내가 그의 피보호자가 된 것 같은 묘한 느낌 탓에 일순간 죄책감이 불려 오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방법을 알긴 안다. 하도 오래 같이 사니 공생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가시압정벌레가 행동을 개시하는 순간, 나는 이것에 힘을 실어 주는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이것을 무력화할 수 있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해야만 한다.


이제까지 [알 수 없는 심리적 원인 – 그에 따른 신체화 증상 – 뒤따르는 어려움 – 경감 조치]가 한 사이클이었다면 이걸 [알 수 없는 심리적 원인 – 그에 따른 신체화 증상 – 신체화 증상을 경감시키는 적당한 조치 – 뒤따르는 어려움의 축소]의 패턴으로 재정비해 보기로 했다.


자극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이름이 필요했기에 이제껏 지칭해 본 적 없던 그 증상에 라벨을 붙이는 것이 먼저였다. 지상 최악의 악당에게나 붙일법한 명칭을 생각해 봤으나 삼십여 년을 함께 한 증상에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뭔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이 나에게 주는 감각 그대로를 서술하여 최대한 담백한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이름을 붙여도 뭔가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자주 보긴 해도 불쾌한 놈이니 그게 적당하다 싶다.


가시압정벌레가 자극을 가하면 나는 그에 대한 반응으로 몸을 바삐 움직이고 땀을 흘리고 일을 하고 ‘쓰다듬’을 재현할 것이다. 평온한 상태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벌레를 손쉽게 잠재우겠다고 다른 자극적인 것으로 자신을 속인다면 곧 두세 배의 불쾌감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제대로 된 반응을 해야 한다. 이 자극-반응의 고리를 튼튼하게 만들어놓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벌레를 제거하는 다양한 방법을 만들어놓는 것 또한.


어제는 다양한 방법 찾기의 일환으로 ‘너무 뻔하고 지루해 보여서’ 한동안 하지 않던 감사일기를 다시 써 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적당한 소음을 내며 진한 글씨를 쓸 수 있는 잉크 펜을 들었다. 순식간에 한 페이지를 채우며 벌레의 활동을 잠재웠다. 이것도 효과가 있었다. ‘반응’ 리스트에 추가할 것.


나는 네가 싫지만, 평생 너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니 최대한 원만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부드럽게 널 다루어 낼 수 있도록 내가 더 지혜로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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