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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유 Jun 18. 2021

유학생으로서 실감한 예술교육의 고질적 문제

애당초, 예술을 가르치고 평가할 수는 있는 걸까?

프랑스 지방 변두리에 위치한 우리 학교는 거의 매주 현재 활동하는 아티스트, 타 미술학교 교수, 미술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 등등을 초청해 특별강의를 기획했다. 교육 평준화만큼 미술교육에도 평준화를 지키고자 노력했던 프랑스 예술정책의 꽃이라고 해야 할까...아무튼 이 특별강의는 학교의 몇몇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당시 2학년이던 필자는 수업이 다 끝난 늦은 시각에 특별강의로 끌려가다시피 들어가 넓은 시청각실 구석에 동기들과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강의 내용은 솔직히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기억하는 건 시청각실 가장 앞줄에 이웃 명문예술학교의 (삽화, 프린트,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는 유럽 전체 1,2위를 다투는 학교) 당시 교장님이 앉아 계셨다. 강의가 얼추 끝나고 이 교장님이 몇가지 질문을 하시고, 별안간 뒤에 앉은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툭 한마디 던지셨다.


"L'art ne peut pas être éduqué."
 "예술은 가르칠 수 없어요."

당시에는 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학교의 교장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의아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교육자 입으로 예술을 교육할 수 없다고 하는 게 꽤나 혼란스러웠다. 찬반의 공존이 프랑스 정서라는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 하지만 미술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떠올릴 때 그 말이 반드시 같이 생각난다.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선명하게 남았을까. 그 땐 황당했던 말이 지금의 내가 가진 여러 근본적인 물음들 중 하나가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예술은 과연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예술계에서 꽤나 뜨거운 감자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미대를 졸업한 학생들 중 전업작가가 되는 비율이 겨우 5%밖에 안 된다고 한다. 더욱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가들과 현재 활동하고 있는 유명 예술가들 중, 예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의 수도 상당하다. 즉, 비전공자가 전공자 이상으로 많으며 전공자보다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다는 거다. 전공자였던 입장에서 이는 냉정하고 씁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경험한 "예술의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의 미술학교는 진급율보다 유급율과 자퇴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나와 함께 신입생으로 입학했던 동기들 40여명 중에 유급 없이 3학년까지 진급한 이들은 겨우 15명 언저리였고, 그 15명 중 5학년까지 올라가 졸업한 이들은 6명 (편입생 제외). 미술학교를 재학하면서 매해 학생들이 절반씩 줄어든다는 소리. 더군다나 졸업한 6명 모두가 작가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이것들이 다 의미하는 바는 뭘까? 이렇게 문제적인 예술교육을, 받아본 학생의 입장에서 되돌아보면 미술 공부는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공부를 통틀어 가장 까탈스럽고 어려웠다.


풀이도 정답도 없고, 개성이 우선되지만 특출해야 했고, 반드시 메시지가 있어야 했으며 그 메시지는 참신해야 하며 도를 넘어서는 안 되었다. 색의 선택과 붓질 하나에도 이유가 있어야 했다. 결과물은 보기에 아름답거나 흥미로워야 했고, 첫 아이디어부터 마지막 결과물까지 도달하기까지 그 과정이 뚜렷해야 하며, 한눈에 모두가 납득할 수 있어야 했다.


당연히 완벽할 수야 없고, 배우기 위해 학교에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내 속도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마냥 예쁜 것이 좋아서, 손을 움직이는 게 좋아서 시작한 공부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했다. 유급하지 않기 위해, 대학에 가기 위해 죽어라 공부만 했던 고3에게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렴"이라고 한들 무얼 할 수 있을까? 지방 도시라는 지리학적 한계, 보고 배울 것이 너무 적었던 미술관, 충분치 않았던 미술사 수업, 도시 밖에 나가야만 찾을 수 있는 화방, 유학생에게는 너무 비쌌던 재료들...이 많은 것들로 인해 창의성에는 한계를 느꼈다. 사람의 창의력에는 한계가 없다지만 사실은 있다. 사람의 사고는 결국 보고 듣고 느끼는 환경에 의해 크게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마냥 좋아서 시작한 그림 공부는 결국 이 창의성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졸업시험에서 낙방한 나는 내 능력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물론 자존심에는 큰 상처를 입었다. 내가 세워뒀던 계획과 미리 그려뒀던 미래의 그림들이 틀어지는 것이 용서할 수 없었고, 시험에서 떨어진 내 자신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용서할 수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 그것이 오로지 내 실력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남들에 비해 언어 면에서 압도적으로 준비가 많이 되어 있던 유학생이었지만, 그림에 대한 재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설령 그 재능이 없었더라도, 창작에 요구되는 수많은 조건들에 굴하지 않고 뚝심있게 이어나갈 수 있는 정신력이 있었다면 그림 공부를 계속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재능이 충분치 않았고, 그 재능을 커버할 만큼의 수완이 나에게는 없었을 뿐이다. 나는 내가 만든 그림을 남에게 보이는 것도, 설명하는 것 하나도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그 어떤 계획도 세워두지 않았던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부모님께 전화해 소식을 알렸다. 전화를 받은 부모님은 어떤 심정이셨는지 모르겠지만, 고집 센 장녀가 울면서 전화한 걸 보고 안쓰러워하지 않으셨을까. 며칠 간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 부모님과 한번 더 통화를 했다. 파리에 있는 예술계통 전공이 있는 국립대학과 사립대학 몇군데를 봐두었다고, 얼른 서류 꾸려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유학생활을 지키기 위해 큰 산을 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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