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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계좌 개설을 미루는 동생에게

자녀 명의 계좌 개설을 권하는 이유

by 시간부자

첫 아이를 낳고 얼마 뒤 아이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었다. 몇 가지 서류와 아이 도장, 내 신분증을 준비해서 은행 창구에 방문해야 했다. 몹시 귀찮았지만, 의지를 가지고 실행했다. 귀찮은 일들은 대체로 막상 착수하고 나면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다. 그래서 둘째를 낳았을 때는 미루지 않고 빠르게 계좌를 만들었다.


경제적 능력은 꼭 돈을 많이 벌고 못 벌고의 문제가 아니다.
돈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 돈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능력까지 총괄해서 이르는 것이다.
돈에 대한 이해부터 관리, 운영 능력까지 몸에 익힐 수 있도록 부모가 유도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재산은 없을 것이다.
-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EBS '자본주의' 제작팀


신생아 육아 중에는 잠을 제대로 못 자니 만사가 귀찮고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류를 발급하고 은행 창구까지 방문해서 서둘러 계좌를 만든 이유는, 아이 계좌를 만드는 것이 아이에게 돈을 이해하고 관리하고 운영하는 능력을 교육하기 위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계좌를 만들고 아이들 앞으로 나오는 양육 수당과 아동 수당, 아이들이 친척에게 받는 용돈, 세뱃돈 등을 고스란히 아이들 계좌에 모아줬다. 계좌에 어느 정도 돈이 쌓이게 되자 일부는 정기예금에 가입했고, 일부는 아이들 이름으로 주식 계좌를 만들어 배당주와 우량주를 구매했다. 정기예금이 만기가 되면 그 이자까지 다 합쳐서 재예치를 했고, 애들이 온전히 알아듣지 못해도 정기예금 통장과 내역서를 보여주면서 이자가 무엇인지, 왜 이자를 주는지, 첫째의 이자와 둘째의 이자가 왜 다른지(원금이 조금 달랐다) 만기 때마다 설명해 줬다. 주식 배당 통지서를 일부러 우편으로 받아 아이들 앞으로 우편물이 오게 했고, 함께 배당통지서를 보면서 배당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떤 회사 주식에 대해서 얼마의 배당이 나온 것인지, 엄마 주식 배당액과 아이들 주식 배당액이 왜 다른지(투자 금액이 달랐다) 우편물을 받을 때마다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제 아이들은 용돈이나 세뱃돈을 받으면 엄마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감추는 대신 주저 없이 "내 통장에 넣어달라"며 엄마에게 건네준다.


애들이 초등학생이 되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육아에 대해서는 뭐가 뭔지 감을 잡지 못하는 형편이라, 남들의 육아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조언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고 아이들이 받는 돈을 차곡차곡 모으고, 아이들과 그 과정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어 왔던 것은 조금의 후회도 없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카를 낳은 동생에게 "조카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라"라고 적극 권해 왔다.


그런데 귀염둥이 조카가 두 돌이 되어 가는데도 동생은 아직 조카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지 않았다. 이번 추석 때 만나서 왜 계좌를 만들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나에게 동생은 은행에 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조카가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아 하루 종일 아기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서류를 떼고 은행에 방문할 여력이 없다고. 하지만 동생은 조카와 함께 주 2~3회 문화센터를 다니고, 매일 산책을 나간다. 문화센터 오가는 길에, 산책 오가는 길에 주민센터에 들르고 은행에 들르면 될 텐데, 하루에 하기 어려우면 여러 날에 나눠서 해도 될 텐데, 의지가 있다면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동생은 의지가 없어 보인다.


나도 한 때는 그랬다. 돈에 대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돈과 무관한 사람인 척 눈 감고 지내 왔다. 동생과 내가 함께 자란 우리 집의 분위기상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소처럼 묵묵히 일하는 태도는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지만 돈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나 지혜는 자연스럽게 익힐 수 없었다. 양반 집안도 아니었는데, 돈이 많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식의 편견도 있었던 것 같다. 독이 될 정도로 많은 돈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도 그랬다. 그래서 큰 딸인 내가 서른이 되도록 부모님과 네 명의 자녀가 26평 집에 살면서도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려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더 나은 집이나 더 나은 동네에 대한 희망을 얘기하는 가족도 없었다. '돈을 통해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우리 집에서는 갖기 어려웠다.

사회적으로도 내가 어릴 때는 '아이는 돈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돈은 생각하지 말고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공부 열심히 하고 성실히 살면 나머지는 저절로 다 따라온다.'는 기조가 지배적이었다. 그에 더해 우리 집은 특히 더 돈에 대해 무감했기 때문에 나와 동생들은 돈을 대하는 지혜로운 태도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필요에 의해 책을 통해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첫 직장은 돈을 기준으로 선택한 직장이 아니었다. (그럼 뭘 기준으로 선택했냐?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돈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가 첫 번째 연말정산을 맞이하고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지난 1년 동안 이렇게 돈을 많이 썼다고? 난 일하느라 바빠서 돈을 쓸 시간도 없었는데? 카드를 도둑맞고도 모르고 있던 게 아닌가?' 암담했다. 천천히 살펴보니 카드는 도둑맞지 않았고, 다 내가 쓴 것이었으며, 모두 소소하게 먹고 마시고 입고 노는 데 쓴 것이었는데, 다 합치니까 금액이 엄청 많아졌던 것이었다. 명품가방을 산 것도 아니고, 뻑쩍지근하게 여행을 다닌 것도 아니었는데 별다른 생각 없이 소소하게 쓴 돈이 모이니 많은 금액이 되었다.


충격은 받았지만 그 이후로도 일이 너무 바빠 돈에 대해서는 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돈과 무관한 사람인 것처럼 모른 척 눈 감고 살다가 갑자기 이직을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러다가는 진짜 소처럼, 또는 노예처럼 일만 하다가 삶이 끝나겠다'는 생각에 비로소 돈과 관련된 여러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네 개의 통장,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레버리지, 청춘의 돈 공부, EBS 자본주의,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심리계좌, 돈의 속성, 돈의 심리학 등등 장기간에 걸쳐 많은 책을 읽었다. 그중에는 나와 맞지 않는 내용도 있었지만, 최대한 마음을 열고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구나' 알아가는 재미로 다양하게 두루두루 읽었다.


그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었던 두 책 'EBS 자본주의 사용설명서'와 '심리계좌'는 내가 운영하는 독서모임에서 다시 읽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까를 고민하기 전에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어떻게 돈을 덜 쓸까? 가 아니라
어디에 돈을 쓰면 가장 행복할까?를 고민하라.
- 심리계좌, 이지영


아이에게 나중에 돈을 물려주기 위해 계좌 개설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나나 동생이나 자녀에게 물려줄 만한 돈까지는 없다. 돈에 대한 지혜를 길러주지 않은 상태로 그저 많은 돈을 증여 또는 상속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오히려 독이 되는 사례도 업무상 몇 차례 목도한 적이 있기에 돈 자체를 물려주는 것은 그리 권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 계좌에 내 돈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들이 정부에서, 주변 친척들에게서 받았던 돈을 그저 모아주었을 뿐이다.


그리 대단한 것을 사지도 않았는데 수중의 돈이 모래알처럼 흩어 없어진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이들 키울 때 들어가는 소소한 돈도 그렇다. 아동수당, 세뱃돈 등은 아이 장난감, 옷, 학원비 등으로 흩어 없어지곤 한다. 그렇게 모래알처럼 흩어질 돈을 아이 계좌에 차곡차곡 모으고, 아이와 함께 모래알이 점점 많이 쌓여가는 것을 관찰하고, 그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운영할 지에 대해 서로 대화를 해보며 돈에 대한 지혜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경험을 해보았으면 한다. 돈이 무작정 좇아야 할 대상도 아니고, 어렵다고 회피해야 할 대상도 아닌, 함께 있을 때 편안하고 좋은 친구처럼 대하게 되면 좋겠다. 하나뿐인 귀여운 조카를 위해서, 그리고 어릴 때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동생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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