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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Sep 21. 2024

<백년보다 긴 하루>

거대한 우주 속에서 한 인간의 죽음을 추모하는 방식

   이 이야기는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주인공 예지게이가 친구를 묻어주기 위해 길을 떠나면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을 나누고 의지했던 친구 까잔갑이 죽자, 예지게이는 “사로제끄에서 가장 이름 높고 유서 깊은 묘지 아나–베이뜨”에 묻어주고 제대로 예를 갖춰주기를 원한다. 까잔갑의 아들 사비찬은 까잔갑이 일해왔던 보란리-부란니 역 근처에서 빨리 장례를 치루고 떠나기를 바라지만, 예지게이에게 그런 짓은 어림도 없는 행동이다. 사비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지게이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묘지로 출발한다. 


   공교롭게도 까잔갑이 죽은 날, 사로제끄 근처 우주선 발사 기지인 사리-오제끼에서 우주선이 발사된다. 삭막하고 광대한 스텝 위에서 살아가던 한 인간의 죽음이 거대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우연히도 그런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까잔갑을 묻을 아나-베이뜨를 향해 길을 떠나는 예지게이는 까잔갑이 선물해 준 낙타인 부란니 까라나르를 타고 간다. 우주선을 발사하는 시대에 낙타를 타고 스텝을 가로지르는 예지게이는 전통적 문화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사람은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이기 쉽지만, 지켜야만 하는 원칙과 인간의 도리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더라도 변화하는 세상에 어떻게 해서든 적응해서 살아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예지게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구술되어 오던 민담과 전설, 신화 등이 자연스러운 세계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진행되는 이야기는 미국과 소련이 합작해서 우주선을 쏘아 올려 행성 엑스의 광물 자원을 캐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우주를 향해 뻗어나간다.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두 이야기가 어떻게 만날지 궁금할 새도 없이, 예지게이가 살아온 삶과 그의 사랑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묘지 근처에 다다르게 된다. 


   예지게이가 관통해 온 시대는 전쟁과 이념 갈등과 체제 변화의 소용돌이 속이었는데, 부박한 한 사람의 인생에서 정말 꼭 필요한 것은 타인의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을 작가는 이 장대한 이야기를 통해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쟁통에서 살아남은 예지게이가 다시 일어나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까잔갑을 통해서였고, 유고슬라비아 해방군으로 활동하다가 사로제끄로 흘러들어온 아부딸리쁘와 자리빠 가족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예지게이 가족 덕분이었다. 


    우주 비행사들이 발견한 “레스나야 그루지”라는 행성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세계를 보면, 지구인들과 당대 사회의 한계가 선명하게 대비되어 지구의 미래를 낙관하기는 힘들게 된다. 게다가 지구인들은 그들과의 교류를 거절하고 방어막을 치는 결정을 내려버린다. 이런 모습을 보면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언급한 대목이 떠오른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문명이 그보다 약간 선진적인 또는 약간 후진적인 문명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야만적 상황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 우리는 저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620-630쪽, 칼 세이건, 『코스코스』, 사이언스북스)


    하지만 모두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수평적으로든 수직적으로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로제끄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조금은 희망을 갖게 된다. 우주에서는 모래알보다 작게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살고 사랑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앞으로도 지속될 삶의 태도가 무엇일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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