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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Feb 15. 2022

(18) 코로나바이러스

내가 호주로 가던 12월 말.


중국 우한에서 병명을 알 수 없는 폐렴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땐, 중국은 워낙 땅이 넓으니 그런 전염병도 돌고 그러는구나 하고 대충 넘겼다.

아마 나를 포함한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호주로 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 뭘 들고 가는 게 좋을까 하며

리스트를 쭈욱 적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12월 호주 동향을 살폈다.

그땐 시드니에서 워낙 몇 달 동안 큰 불이 났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 타는 냄새와 잿가루들이 엄청나게 날린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워홀러들의 글들이 종종 보였다. 

나는 이를 대비하기 위해 다이소에 들어가 3,000원짜리 부직포 마스크 20개입을 구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스크는 그렇게 필수 용품이 아니었었다. 그래서 괜히 돈 낭비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었다.

두 번 다시 이 가격대로 살 수 없다는 걸 예상하지 못한 채.


1월 20일경

한국에도 우한 바이러스 환자가(중국인)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점점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마스크 구매가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래도 윗 지방 이야기 일뿐 내가 사는 아랫 지방까진 크게 영향이 없다고 들어 곧 끝날 해프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호주 멜버른에도 확진자가 나왔단 뉴스가 나왔다.

대구에서는 특정 종교단체에서 폭발적으로 감염자가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엄마가 몇 달 전만 해도 일했던 병원은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 전용 병동으로 변했다고 하고, 그 와중 직원들도 감염이 되어 코로나 검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마스크는 더더욱 구하기 힘들어졌다.


호주는 해외에 있는 자국민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 만큼 강력하게 코로나를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호주 국경을 닫았다. 호주에서 다른 나라로 나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외국인은 호주 입국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난 이 뉴스를 믿지 않았으나, 사무실로 들어가는 로비에 틀어진 뉴스를 보고서야 실감이 났다.



워홀러들, 학생비자 같은 임시비자 소지자들은 대거 본국으로 돌아갔다. 셰어하우스로 장사를 하던 사람들도 타격을 받았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일하는 사람을 구하는 것도 함께 힘들어졌다. 


일자리를 잃은 한국인들 중에 방값을 내지 못해 당장 거리에 나앉게 생긴 경우도 있었고, 굶고 있는 경우도 흔하게 있었다. 그로 인해 한 한인 교회의 목사님은 밤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떡을 돌리러 다녔다.

나중엔 한인 가게에서 협업하여 힘들어하는 워홀러, 학생들을 위해 무료로 도시락을 배부하기도 하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값은 폭등했고, 비행기를 잡는 것도 힘들었다.

계속 취소되는 한국행 비행기에 하소연하는 글들이 쉽게 올라왔고, 비행기 티켓팅에 성공한 사람들은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서랍, 청소기, 이불, 쿠션 등 각종 생필품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호주에선 사재기가 시작되었다. 그중에서 한국 열라면은 그대로 있길래 그것만 나도 몇 개 가져왔다.

화장지도 동이 났다. 화장지를 만드는 재료로 마스크를 만들기 때문에 화장지도 곧 판매가 중단이 될 거라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호주 마트에서 몸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국 뉴스에 나왔다. 


그리고 3월 경에는 셧다운.. 일부 가게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게들은 문을 닫아야 했다. 내가 일했던 한국인 회사에서는 나에게 재택을 할 건지 회사로 나올 건지 선택지를 주었다. 집주인과 함께 사는 나로서는 최대한 집 밖으로 나가는 게 편했기에, 재택을 선택하지 않았다.



심심한 저녁,

인터넷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김신영의 정오의 희망곡 게스트로 나온 트로트 가수 홍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아서 목이 쉬었다고 한다. 한국은 아직 여유로워 보였다. 코로나는 정말 남 이야기라는 듯. 


라디오 마무리 멘트로 "모두 건강하세요~~!" 라며 쉰 모소리로 인사를 했다.

건강하라는 이 말이 이렇게 와닿은적이 있었던가..?


그날 저녁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셧다운이 되어 무섭다며 어플로 메세지를 보냈다.

팝송 한 곡이 흘러 나오고 난 뒤 배철수 dj는 이렇게 말했다.


"호주에서 듣고 계신분들이 많으시네요. 박XX씨, 오늘 호주는 셧다운을 시작했습니다. 제 아내는 일자리를 잃었고, 저도 일하는 시간이 반이나 줄었네요. 마음이 답답합니다. 이XX씨 셧다운이 공포스럽게 느껴져요. 한국으로 돌아 가고싶은데 비행기도 많이 없네요"

그리고 호주에서 사연 2명의 이야기를 더 읽어주고 다시 흘러나오는 선곡된 팝송.. 


나 뿐만 아니라 호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혼란스럽고 외롭구나.. 생각했던 밤이었다. 



자주 가던 슈퍼엔 중국인 캐셔가 마스크를 끼고 비닐장갑을 끼고 있었다.

며칠 뒤, 코로나가 눈으로도 감염이 된다는 기사가 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방문한 슈퍼엔 중국이 캐셔가 선글라스도 끼고 있었다. 



그렇게 셧다운이 시작된 첫날, 너무 복잡해서 앉을자리가 없었던 트레인엔 나만 타고 있었다.



회사로 도착하려면 아직 몇십 분이나 남았는데 지루할 때 읽으려고 한국에서 중고로 사 왔던 e-book을 괜히 켜보았다.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트레인 안에서 창밖을 보니 차도,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순간 너무 무서웠다. 


'나 계속 여기 있어도 되나..?'

'만약에 내가 코로나라도 걸리면..?'

이라는 괜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 보게 되는 한국은 왜 이렇게 방역에 철저해 보이는지, 다들 정말 빠르게 움직이고 대비를 하는 것 같았다. KF94 마스크는 어찌나 또 부럽던지... 해외의 사재기를 보며 한심하다고 말하는 저 모습도 왜 이렇게 여유로워 보이는지! 



한국으로 너무나도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곧 사라질 해프닝이라 생각하여 조금 더 버텨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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