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지상으로 달리는 트레인은 비가 오면 크게 타격을 받는다. 레일에 흙더미들이 흘러 들어오거나 다른 장애물들 때문에 트레인들이 운행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트레인을 보내고 퇴근길 겨우 트레인을 탔다. 셧다운 이후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 찬 트레인이었다. 이 중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오직 동양들 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코로나는 동양인들만 걸리는 질병'이라는 인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호주 트레인은 총 2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앉을자리가 있나 하여 1층을 보니 자리가 충분히 남아있는데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10대 아이들 3명이서 무려 6칸의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있었다. 이들은 정말 시끄러웠다. 트레인 안에서도 "아휴 쟤네랑 상종 안 해야지"하는 듯한 분위기가 풍겨졌다.
안 그래도 시끄러웠던 백인 10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유 즉슨, 바로 옆에 마스크를 끼고 있는 중국인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0대 애들은 코로나 바이러스! 라며 구토하는 소리를 냈고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발길질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인 여성은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10대 애들은 마치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에 재미라도 들린 듯 더 오기를 부려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늦지 않은 타이밍에 2층에 있던 한 백인 여성이 소리를 듣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너희들은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며 짧고 날카롭게 경고를 주었다. 순간, 백인이 말리러 와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 있던 부직포 마스크를 만지작거렸다.
나도 마스크를 꼈었더라면.. 저 아이들의 타깃이 되었을까?
뉴스에서만 보던 코로나로 인한 인종차별을 눈앞에서 가까이 보니 나에겐 정의로움은 온데간데없고, 무기력함만 몸을 감쌌다. 같은 동양인으로서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순간 나도 공격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동양인 여성은 해외에서 너무 약한 존재인 것 같단 기분을 그때 처음 느꼈다.
코로나로 인한 분노 표출,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Kelly언니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욕을 하는 남성을 봤다고 하고, 시드니 외곽지역에서도 동양인 폭행 관련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코로나 펜더믹이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고립되었다. 특히, 나같이 해외에 나와있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공포는 급 상승했다. (다행히도 호주가 덜 한 거지 유럽 쪽 나라들은 정말 우울하고 슬펐다고 한다)
네일숍도 문을 닫고, 미용실도 문을 닫았다.
결혼 준비 때문에 웨딩 네일을 했던 켈리 언니는 셧다운이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자 직접 손톱깎기로 네일을 제거했다.
나랑 같이 있던 남자 사람 친구는 머리를 자르지 못해 중고 카페에서 이발기를 직접 구매했고, 나보고 뒷 머리를 좀 잘라달라고 했다. 결과는 완전 엉망이었다. 그래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유행과 상관없는 머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나랑 자주 붙여 다녔던 친구는 집에 샤인 머스캣 밭을 해서 나에게 별명이 '포도 방'이었다.
이 친구랑은 같은 경상도 사람인 것도 있고, 같은 유학원을 통해 왔으며, 제일 좋았던 건 둘 다 같이 빠른 년생이 었기 때문에 친해지는 속도가 빨랐다.
우리 둘은 가끔 말할 상대가 필요할 때면 전화나 카톡을 길게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하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주절주절 대결하듯 말했다.
특히 맛집을 많이 알고 있던 '포도 방'은 나중에 한국에서 만나게 되면 여기저기 가보자며 나에게 말하곤 했다.
한국에 있었을 땐 그렇게 관심이 없던 야구장, 축구장, 놀이공원, 콘서트, 뮤지컬 등등이 너무 보러 가고 싶었다.
이상하게 한국이 너무 그리웠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빠른 시내에 한국이 그리워졌다.
'포도 방'이랑 가끔 만나서 놀 때면 마땅히 놀 곳이 없었다. 구경할 만한 곳, 놀만한 곳들은 다 문을 닫았고, 스타벅스나 패스트푸드점도 앉지 못하게 의자를 모두 테이블 위로 올려놨기 때문이다. 벤치도 모두 앉지 못하게 테이프로 막아 두었고, 도대체 어디를 가야 할지... 우리는 가끔 가성비 좋은 호텔을 잡아 음식을 잔뜩 포장해서 넷플릭스로 킹덤을 보며 놀고는 했다. 그래도 마음 맞는 친구가 있다는 게 크게 위로가 되었다.
한국이 그리워지고, 외로움의 깊이는 1톤짜리 추를 달아놓은 것 마냥 무겁기만 했다. 호주에 처음 왔을 때 만난 한인들은 너~무 말이 많아 그들이 왜 이렇게 말이 많은지 궁금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니 나 또한 그들처럼 말을 트게 되는 사람을 만나면 말이 길어졌다.
대화가 아닌 일방적으로 혼자 말이 많다는 건, 외롭고, 불안하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흘러 알게 된 건 외로운 사람들의 연애는 패스트푸드 같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2주도 안되게 매일 얼굴을 봐도 사랑에 빠졌고, 고향이 같아도 사랑에 빠졌다. 한 시간 동안 웃으며 대화해도 사랑에 빠졌고, 어쩌다가 SNS로 '좋아요'만 눌러도 사랑에 빠졌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데이트할 곳 이 없으니 동거도 빠르게 시작되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결혼과 연애에 관심이 없던 주변 사람들은 연애가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2번째로 이사 간 셰어하우스 집주인은 만난 지 3주밖에 되지 안 된 남자랑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는 나에게 '난 비혼 주의자야'라고 말했었는데.. 그걸 깨트린 남자를 만났다고 자랑했다.
그들은 서로의 고향을 '옆동네'라고 할 만큼 가까운 지역에 본가가 있었다. 그들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결혼을 할 거라며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점사를 보러 갔다고 한다. 둘은 천생연분이니 곧 식을 올려도 나쁘지 않다며.
어느 날은 결혼 후 본격적으로 이민 준비를 할 거라 지방으로 내려갈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여건이 되면 이 집을 렌털 할 생각이 있냐고.
그러나 그들은 3개월도 채 안 가서 헤어졌다.
마음이 가장 위험할 때 연애를 하는 건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담배, 음주를 하는 것 같다. 쾌락과 안전함을 느끼지만 반대로 자립심이 많이 상하는 듯하다.
셧다운이 끝나자마자 기분 전환할 겸 네일을 하러 갔다.
내 인생 첫 도전으로 아주 길게 손톱 연장을 하고 큐빅을 다닥다닥 박았다.
약 한 시간 동안 네일을 하며 샵 주인과 호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샵 주인은 연애에 관련된 내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본인도 여기 지내면서 비슷한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며 말을 꺼냈다.
"제가 건너 건너 아는 애는 애인 없이는 슈퍼도 못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 애는 워낙 외모가 뛰어나서 쉽게 사람을 사귀었었어요. 본인이 골라서 사귈 만큼 선택지도 좋았죠.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 동거까지 하고 파트너가 '모든 걸 다 내가 케어할 테니, 넌 내 옆에만 있어라'라고 처음엔 말했대요.
근데 자신은 너무 파트너한테 의지하다 보니 혼자 남겨지면 혼자 근처 슈퍼도 못 가고, 카페도 못 갔었대요.
처음엔 파트너가 퇴근 후 같이 산책도 하고, 쇼핑도 해줬는데 점점 자립하려는 의지조차 없으니 처음에 잘해주겠다고 큰소리치던 파트너는 질려서 헤어지자 하고..
그렇게 두 번 정도 헤어짐을 당했었대요. 그러고 난 뒤, 나는 해외에서 살 사람은 아닌가 보다 하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