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사례를 각색하여 서술하였습니다. >
영업직인 K차장과 M팀장은 서로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
이 둘은 공통점이 많았다.
둘다 내노라하는 국내 대기업 출신으로, 동종업계 외국계 기업 회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 지금 이 곳에 경력직 간부로 입사를 하였다. (전 직장보다 직급도, 연봉도 더 높아졌다.)
자기 이력에 자부심이 있었고, 전 직장보다 상향된 조건을 받게 되니 우쭐한 마음도 있었다. 아직 국내 사업부가 탄탄하게 자리잡지 않은 회사의 초창기 멤버들을 약간 얕잡아 보기도 했다.
무슨 인연인지 이 둘은 한 팀에 배치되어, 신사업 개척을 위한 신설 영업팀 최일선에서 동고동락하게 되었다.
신설팀에는 K차장과 M팀장 외에 다른 직원은 더 없었다.
본사나 지사장의 통제나 간섭에서도 상당히 자유로웠고, 다달이 나름의 성과를 내어 보고만 하면 되었다.
혹은 성과가 나지 않아도, 신사업의 특성 상 어쩔 수 없노라고, 이렇게 저렇게 활로를 뚫고 있으니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그럴싸하게 해명하면 족하였다.
K차장과 M팀장은 신설팀에서 만나 속칭 "꿀보직"의 달달함을 함께 누리면서,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불알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마음 맞는 두 사람만 함께 하는 직장생활은, K차장과 M팀장에게는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둘은 출퇴근 시간도 마음대로 했고, 느슨한 스케줄에 설렁설렁하게 일하거나, 일은 내팽개치고 학창시절 동창 마냥 당구장, PC방 등을 전전하며 놀기도 했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로, 한 명이 대신 일하고 한 명은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쉬는 경우도 허다했다.
둘만 서로 협조하면, 친구랑 같이 노는 듯한 월급루팡 생활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둘만의 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이 둘의 근무태만에 대해서 누군가 제보를 하였던 것이다.
그 제보가 사실인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지사장은 어쨌든 신설팀의 팀장인 M팀장에게 조용히 연락을 취하였다.
M팀장은 본인에 대한 제보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발뺌하면서, 본인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K차장에 관한 제보는 사실일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고 꼬리를 잘랐다.
영업업무 특성 상 K차장에게 근로시간이나 동선에 상당한 재량을 주었으므로 상세히 감독하지는 못하였는데, 아마 그 사이에 K차장이 불성실하게 근무하였던 것 같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그 증거를 자신이 모아오겠다며, K차장을 불량직원으로 잠정적으로 확정하고 비난했다.
도원결의를 한 것 같았던 둘 사이의 우정은 온데간데 없이, M팀장은 K차장을 배신하고 말았던 것이다.
K차장이 우정에 바사삭 금이 간 것을 눈치챈 것은, 그 날 이후 어딘가 달라진 M팀장의 태도 때문이었다.
대충 휘갈기던 근무일지를 제대로 작성하라고 시키는 것이나, 몇 시에 어디에 가서 거래처 누구를 만났으며 무슨 얘기를 했는지 수시로 보고하라거나, 너무 일찍 퇴근하거나 사무실에 나오지 않으면 사유를 확인하는 행동 등이 말이다.
뭔가 자신의 약점을 잡으려는 거라고 낌새를 챈 K차장은, 그 날부터 M팀장의 근무태만을 증거로 남기기 시작했다.
낮 시간에 사무실 소파에서 퍼질러 자는 모습, 책상 위에 널부러진 술병을 몰래 사진으로 찍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M팀장이 거래처와 교신한 내역을 일일이 긁어모았고, 어딘가 문제가 있는지 샅샅이 뒤져보기도 했다.
먼저 대포를 터트린 건 M팀장 쪽이었다.
M팀장이 그동안 착실하게 모은 증거들을 가져다가 지사장에게 보고하면서, K차장이 제보 그대로 평소 근무태도가 좋지 않았음을 실제로 확인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M팀장은 본인도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일말의 정이 남아서인지 K차장을 약간 두둔하면서, 부하직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본인의 책임도 있으니 이번 한번만 조용히 넘어가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주의를 내리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사장은 따로 K차장에게 연락하여, M팀장이 제시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근무태만 행위를 한 것이 사실인지 물었다.
K차장은 역시 내 감이 맞았구나 싶었다. K차장은 다람쥐가 도토리 모으듯이 차곡차곡 모아둔 증거들을 지사장에게 제출했다. (돌이켜 보면, M팀장은 너무 패를 보여주는 듯이 허술하게 행동했지만, K차장은 M팀장에 비해 훨씬 더 은밀하고 치밀하게 대응한 느낌이다.)
그러면서 K차장은, M팀장이야말로 근무태만을 저질른 장본인이며, 부하직원으로서 충언을 하였으나 듣기 싫다고 도리어 화를 내었기에 K차장 본인도 억울한 마음에 근무기강이 헤이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심지어 M팀장은 일도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직원이므로 회사에서 내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발 더 나아가, K차장은 평소 M팀장이 본인에게 하였던 욕설 등 사건들을 악의적으로 모아서,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까지 하였다. (사실 직장 내 괴롭힘과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들이었음은, K차장 스스로가 잘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렇게 K차장과 M팀장의 진흙탕 싸움이 지저분하게 이어지게 된다. (이후부터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아서,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알지 못한다.)
M팀장과 K차장의 짝짜꿍은 일단 여기까지다.
이 둘의 사례를 보면, "크리스마스 정전"이 떠오른다.
세계 1차 대전 당시, 서부전선을 사이로 대치하던 독일군과 영국군은 지리멸렬한 참호전으로 병력과 자원을 계속 소모할 뿐, 오랜 기간 동안 양측 모두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거듭된 전쟁의 피로 속에, 어느 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어느 쪽인지 병사 하나가 용기를 내어 크리스마스 트리와 반짝이는 전구를 들고 참호 밖으로 나왔고, 이 모습을 본 양측 장병들은 어제까지 서로를 향해 겨두던 총부리를 거두고 하나둘씩 비무장 상태로 나와, 기적처럼 서로 악수와 담소를 나눴다.
이와 같은 묵시적인 휴전은 오래도록 이어졌고, 허공에 총을 쏘는 등 서로 싸우는 척만 하면서 각자 군 복무 기간을 채웠다고 한다. (대학에서 미시경제학 게임이론을 배울 때,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을 우월전략으로 선택한 사례로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결국에는 교착 상태를 견디지 못한 상부의 돌격 지시로, 양측은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하며 결국 휴전은 종식되었다는 이야기다.
누적된 무의미한 희생을 막는 차원에서 크리스마스 정전이 생겼듯이, M팀장과 K차장은 대기업의 격무에서 뛰쳐나온 기회로 잠깐이나마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정전"의 일화는 전쟁에 내몰린 서슬퍼런 군인들이 잊고 있었던 소중한 일상과 따뜻한 내면을 떠올리게 한다면, M팀장과 K차장의 이야기는 그저 회사원으로서 본분을 버린 채 자기들의 편리만 추구하는 한심한 추태에 불과하다.
공통점이라면, 결국 크리스마스 정전이 깨지고 양 군대가 피튀기는 싸움터로 내몰린 것처럼, 이 둘 역시도 각자가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니 쉽사리 서로를 배반하고 각자를 밀고하는 고자질과 음해의 싸움에 빠져들었던 것 뿐이다.
서로의 묵인 하에 누렸던 안락한 나날들은, 실은 너무도 불안정한 줄타기 같았다.
공고한 것 같았던 이 둘의 우정은 모래성처럼 가볍게 무너지고, 우정의 자취조차도 흩날리는 모래마냥 흩어지고 말았다.
한때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을 K차장과 M팀장의 전쟁이 과연 어떻게 끝났을지 때때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