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명한 새벽빛 Jun 02. 2016

내면의 소리

나의 유일한 적은 바로 나

이미지 출처 - 페이스북에서 내려받음


너는 왜 이 모양이야?


그 누구보다 나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이 존재는 나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만족하는 법이 없다. 그 덕분에 내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지쳐서 휴식이 필요할 때조차 다그치는 통에 나는 고통스럽다. 그래서 반항심도 생긴다. 나는 제발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다. 누워 있어도 어지러운 나머지, 오늘 하루는 직장을 쉴 수밖에 없었다. 기절한 듯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초저녁이다. 아직 호르몬의 장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에 이미 며칠 전부터 부정적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굳이 내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 텐데 나는 또 여러 사람에게 티를 냈다. 아파서 그런 것이라고 항변해 보지만, 배려할 줄 모르고 또 생각 없이 행동했다고 나를 나무란다. 엄살은 그만 부리라고, 제발 좀 아프지 말라고. 그나마 몸도 마음도 많이 건강해진 편인데도, 얼마나 더 좋은 상태를 원하는 것인지 장단 맞추기 참 힘들다.


너는 잘못한 게 없어!


내가 언제나 타당한 관점에서 옳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격려해주는 이 존재가 나를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인 양 치켜 세워줄 때마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 덕분에 나는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태연할 수 있다.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도 한다. 이 존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을 들어주어 나의 합리화를 도와준다. 그럴 수도 있지.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너는 할 만큼 했어. 수고했어. 이미 이대로도 너는 멋져. 너무 애쓰지 마. 다른 사람들이 너의 가치를 참 몰라주는 것 뿐이야! 나는 '정말 그럴까?'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가 이내 그 달콤한 말들에 현혹되고 만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 말들 덕분에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다. 나로서 존재할 수 있고 나를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셈이다.


너, 정말 괜찮아?


의심하기를 좋아하는 이 존재의 특기는 답 없는 질문 던지기이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하며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제동을 걸기도 하고, 상반된 두 존재가 다투고 있을 때에도 어김 없이 물음표를 던진다. 과연 어느 쪽이 맞나?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까? 둘 다 맞는 것 같지만 혹시 둘 다 틀린 것은 아닐까? 이대로도 괜찮을까? 한 쪽의 말만 들어도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물음을 던져주는 것에 감사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답도 안 주면서 나를 혼란스럽게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괜히 복잡해지지 않으려 모른 척 할 때도 있지만, 이왕이면 물음에 답해보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내가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한다. 무엇이든지 간에 극단적인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내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것에 감사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많은 가수들에게 불려진 <가시나무>라는 노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들을 때마다 공감이 되어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존재들은 모두 내 안의 '나'들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나는 외로웠다. 그렇게 내면의 소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니,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들릴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은 알아주지도 못하는 바보. 그렇다고 평화롭게 하나를 선택하지도 못한 채 내 안의 나들이 서로 소리를 높여 다투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기에 나는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궁금했다. 답을 찾고 싶었다. 서로 협력해서 더 나은 선택을 하면 될 텐데 왜 내 안에는 이렇게 전혀 다른 목소리가 서로 싸우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그 안에서 갈팡질팡 하는 나 자신이 안쓰러웠다. 나의 원수는 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못살게 구는 유일한 나의 적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를 버려야 안다는 말의 의미


유난히 고집도 세고 생각도 많은 나는 수시로 내 안의 소리에 휘둘려 내 속에 빠져버리기 일쑤여서, 어떻게 하면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 모든 나를 통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느 때나 지혜롭게 선택을 하는 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지혜'가 탐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눌러 담는 데 몰두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식을 아무리 더 집어넣어 봤자 그들의 지혜가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더하면 더할수록 자기가 잘났다고 떠드는 '나'의 목소리들만 많아지고 실천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나'들에게 질려 갈 때 쯤에야, '나를 버려라'라는 말이 들렸던 것 같다. '아는 것'이란, 나를 다 비운 자리에서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고 그것이 '지혜'라고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처럼 버려야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라면, 나는 나를 꼭 버리고 싶었다. 답이 안 나오는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버렸기 때문에,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살 방법이기도 했다.


나를 버리는 일의 어려움


말은 쉬운데 나라는 존재가 쉽게 버려질 리 없었다.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한 이후로 '나'와의 살벌한 전쟁이 시작된 것 같기도 했다. 마음빼기 명상은 나를 쉽게 버릴 수 있는 방법이지만, 내가 나를 버릴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나를 질책하는 내면의 소리에 원망하면서도 그 존재가 없다면 내가 발전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불안했다. 게다가 언제든지 내 편을 들어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은 더 두려웠다. 나를 다 버리면 너는 어떻게 살겠어?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면 너도 견디고 살아야 하는 거잖아? 자신들을 '가짜 나'로 치부하며 버리겠다고 마음 먹은 나에게 내 안의 '나'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버려봐야겠다며 용기를 냈던 것은 종교나 여러 책들을 통해 '버려도 있는 것' 혹은 '버려야 드러나는 것'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했던 덕분이었다. 게다가 나의 유일한 적이 바로 나였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무엇이 진짜일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마음수련 명상을 통해 나를 버리면서 많은 이들이 이야기 해왔던 것이 모두 맞는 말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고 있다. 나와 남을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지혜와 기쁨 자체인 그 참마음이 우리의 '진짜 마음'이고, 그것이 '진짜 나'라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그동안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헷갈리게 했던 그 내면의 소리들은 전부 이 몸에만 국한된 '나 하나'를 위한 속좁은 고민에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금방 내 속에서 빠져 나와서 세상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랄까. '내'가 잘난 존재가 되려고 하니까 힘이 들고 로웠는데, '세상'의 입장에서 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이미 세상 자체였다. 그래서 마음을 버리면 나도 세상과 하나가 되어 순리대로, 가장 자연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진짜 나'는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가짜 나'를 버려야 보이는 것이고 그랬을 때 모든 것은 저절로 되어진다. 진짜 마음으로 사는 삶이 가장 나다운 삶이고 누구보다 행복한 삶이다.


진짜 마음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가장 큰 세상의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만 틀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