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곧 삶인 이유
이미지 출처- 네이버 웹툰, 시니&혀노 작가님의 <죽음에 관하여> 3.5화
* 이 글의 예상독자: 죽고 싶은 사람과 살고 싶은 사람, 죽는 것이 두려운 사람과 사는 것이 두려운 사람. 또는 죽음과 삶이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
2013.06.29
니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노
니가 그렇지 뭐
니한테 뭐 말하기 싫다
그래 니는 그렇게 살아라
이 말들이 가슴을 후벼파는 건
내가 진짜 그따위 인간이어서일까
아니면 단지 you-메시지여서일까
내 맘이 힘든 건 내 마음 탓이란 걸 안다
그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든다
솔직히 자신이 없다
아직도 난 가시 돋힌 말들에
자유롭지 못해
그래서 학습된 무기력증이 무섭나?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는 모르겠고
어떻게 하면 나쁘고 비난 받고 책망 받는지는 실컷 배웠다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는 멍청이에다가
내가 하려는 건 아무 것도 안 해야 좋은 아이다
이제 와서 나 혼자 발버둥치는 거
참 안타까워 보여
잘 나가다가도
다시 막혀
눈 떠보면 역시나 제자리야
어떡하지?
일촌공개로 썼던 일기에 친구가 노래가사인 줄 알았다고 했었는데 다시 보니 라임이 좀 되네? 답답함에 끄적였던 일기다. 지금은 비공개로 해둔 싸이월드 다이어리에서 가져왔다.
종교에서 나름대로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이제 행복하다고 믿고 싶었지만,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는 증거인가.. 그래도 이 때는 이렇게 일기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나의 글 <내 꿈은 말이야>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싫어했던 교회에 다시 걸음을 했던 것도 사실은 죽기 전 마지막 시도와 같은 절박함에서 한 선택이었다. 시험이고 뭐고, 내가 살아야 시험을 치러갈 수도 있는 것이니까.
손가락질 받는(다고 착각했던) 나의 쓸모 없음과 무가치함에 질려서 나 같은 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이 적지 않게 있었다. 어차피 존재해 봐야 이런 고통으로 힘들어야 하니까, 나는 더 이상 힘들기 싫었다.
죽을 것 같은 불안도 경험한 마당에 내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고통이 더 두려워서 정말 죽고 싶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머리를 굴려 보았다.
'만약에 내가 진짜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음이 곧 삶인 이유
책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대학교 2학년 때, 동기가 추천해 주었던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었다. 재미있는 청소년 소설이다. 실은,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은 그때 이미 던져 볼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고, 그때 이미 울 만큼 울었었다.
내가 죽고 없다면 슬퍼할 많은 사람들. 혹여 내 곁에 아무도 없다고 하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애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당연하게 있던 존재가 사라지는 일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작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내가 힘든데 남이 보일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틀림없는 착각이라는 것을 당신도 반드시 알았으면 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불현듯 남아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죽을 만큼 힘든데 죽을 수조차 없는 그 상황은 나를 더 고통스럽게 했다.
많은 이들이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있다고 들었다. 자살도 그렇게 어렵다는데, 그 정도 노력으로 뭐라도 해보고 선택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이 고통이 끝나는 방법이 정말 죽음밖에 없는 것이 확실하다고 알려주는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죽음에 관하여 생각했던 나를 돌아본다. 당시에 나를 가장 힘들게 한 마음은 '책임감'과 '부담'이었다. 내가 빨리 돈을 벌어서 우리집이 가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책임감 때문에라도 살아야만 했으니, 나의 힘듦은 내가 죽고 싶으면서도 죽고 싶지 않게 만든 셈이다.
그래, 죽음과 삶이 다르지 않았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 것이었다. 잘 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누군가 '너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너무너무 살고 싶다'는 내면의 절박한 외침이다.
그러니 죽는 방법 대신 사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다. 어차피 둘 다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살기가 싫은 건데?'라며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 혹여 모를까봐 알려주는데, 당신은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니가 뭘 알아?'라든가 '나는 이러저러한데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야?'라고 나한테 묻고 싶을 수도 있다. 또는 삶이 너무 만족스러워서 죽음이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죽음은 온다. 당신이 살고 싶건 죽고 싶건, 당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도, 그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기에 나도 이런 글을 써서 알려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렸고,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치기로 했다. 돈이 없어서 엄두가 안 나는 일 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다. 그렇게 마음만 바꿔 먹었을 뿐인데 나에게 찾아온 기회와 방법들에 나는 그때 그냥 삶을 포기했으면, 용기 내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다.
게다가 요즘 하고 있는 마음수련 명상은 그토록 죽고 싶고 그냥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던 내가 아주 쉽게 죽을 수 있게 도와준다. 마음수련 명상센터에는 사람이 완전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완전히 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면,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 같이 '살기 위해 죽는 곳'이 바로 마음수련 명상센터다. 이것은 맛집의 요리 비법 같은 것이라서 원래는 이렇게 바로 알려주면 안 되지만,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당신이 이것을 안다고 흉내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살짝 귀띔해 주는 것이다.
아, 마음수련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내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생각으로 상상으로 죽는 것이니 오해하면 큰일난다. 그러나 진심으로,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만약에 죽으면?'이라고 머리를 굴려 보았듯, (마음으로) 실제로 죽어 보는 것이다. 진짜로 죽는다면, 당신은 당신을 괴롭혔던 그 모든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으로 당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이 명상의 시작이자 끝이며 가장 중요한 뽀인트. 그리고 그 죽은 입장에서, 나 아닌 세상의 입장에서 나를 돌아보고 그것을 빼기 한다. 이 매거진 <나를 돌아보다>는 '살려고 죽은 사람들'이 자기를 돌아본 이야기들로 채워질 것이다. (아직은 나만 연재하고 있지만 작가님들을 더 섭외할 예정)
진짜로 우리의 몸이 죽고 나면, 남은 사람들 말고, 우리 자신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지만, 네이버 웹툰 중 시니&혀노 작가님의 <죽음에 관하여>에는 꽤 그럴 듯하게 그려져 있다. 실제 사후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관하여 생각해 봄으로써 삶에 관하여 배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명작 중에 명작이라 할 만큼 굉장한 웹툰이다.
죽음에 관하여 써 보려고 제목을 입력하다가, 같은 제목을 가진, 제가 좋아하는 네이버 완결 웹툰 <죽음에 관하여>가 생각이 났습니다. 다시 정주행 하려니 5화부터는 유료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책도 있습니다. 정말 명작이니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허락 없이 이미지를 일부 가져왔으나 부디 허락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웹툰에서는 이렇게 어떤 한 사람이 정신을 차리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은 살던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한 후에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당신이 실제로 죽고, 살던 곳에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과연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이 할아버지처럼 당신도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할 뿐, 괴로워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으며, 당신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쉽고 간결해서 놀라움 자체였던 이 마음수련 마음빼기 명상도 간혹 어렵고, 힘들고, 마음이 안 버려진다 싶을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대개 죽음을 실제라고 인정하기 싫어서 생기는 문제였다. 앞서 이야기했듯 진짜로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 죽는 것이라고 해도 나의 무의식은 그것을 죽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러나 스스로 인정하든 안 하든 이미 죽은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그저 각 과정별 방법대로 빼기를 하는 데 집중하기만 하면, 힘든 고비는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내 무의식과의 싸움에서 지지 말고 꼭 끝장을 보시길.
진짜로 죽으면, 내가 책임져야 할 모든 일들로부터 자유롭다. 아.무.것.도.안.해.도.된.다! 나는 이 명상 방법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나를 돌아보니까, 나는 평생 '나'라는 작은 틀 속에서만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죽고 싶었지만 죽을 수 없게 했던 내 마음의 짐들도 그냥 툭 내려놓아졌다.
예전에는 좋은 딸, 좋은 동생이고 싶은 부담 때문에, 막상 가족들에게 상냥하게 대하지도 못하고 신경질적이었는데, 오히려 욕심을 버리니까 저절로 그렇게 행동하게 됐다. 이제는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된다. 그래서 정말로 살 만하다. 마음빼기 명상으로 죽도록 죽은 덕분이다.
궁극적으로 이 공부를 끝까지 하면, 가짜인 내가 다 죽는다. 한 평생 나라고 믿고 살아온, 내가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집착했던 그 나가 진짜 내가 아니라 세상 자체가 나였다. 그래서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우리의 이 몸은 언젠가 죽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고 영원함을 갈구한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본래인 세상마음이 되어 이제는 누구나 순리대로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진리가 뭔지 관심도 없었던 나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인 세상 자체가 진리임을, 그것이 나의 본성임을 안다. 그냥 아이들 명상시켜 주려고 교원직무연수에 갔다가 내가 얻은 선물이다.
당신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든, 그것은 모두 죽어 버리면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당신의 돈이든 명예든 행복이든 고통이든, 그 어떤 것이든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살아 있음에 감사하자.
매거진 <나를 돌아보다>에는 글 <COEXIST>에서 언급했듯, 제가 마음수련 명상을 하며 돌아보고 알게 된 제 삶에 관하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 취미로 마음수련 명상센터에 다니는 한 사람으로서, 이 매거진을 통해 이 명상을 하는 다른 분들이 더 쉽게 빼기를 하실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싶으며 그것이 저 스스로를 돕는 일이기에 진심을 눌러 담습니다. 또한 명상을 하지 않는 분들도 제 글을 통해 한 번쯤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