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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한 새벽빛 Apr 19. 2016

소수자는 약자가 아니다

영화 <주토피아>가 알려주는 편견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미지 출처 - 다음, 네이버 영화정보
[위키백과] 소수집단(小數集團)은 그 사회의 권력 관계에서 그 특성이 소수에 위치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집단을 가리킨다. 사회적 소수자(社會的小數者)라고도 하는데, 성, 나이, 장애, 인종, 국적, 종교, 사상 등의 측면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국가나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기준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차별의 대상이 되거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소수자는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상황과 여건에 따라 기존 성원도 얼마든지 사회적 소수자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 그 나라에서 기존 성원은 사회적 소수자로 분류된다. 또한, 살면서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관의 변화, 불의의 사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회적 소수자로 취급받아 차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간단히 소수자(小數者)라고도 한다.
[국어사전] 약자(弱者) : 힘이나 세력이 약한 사람이나 생물. 또는 그런 집단.


소수자에게 무관심한 사회적 소수자


누구나 사회적 소수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무관심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소수자에 대한 처우에 관심이 아주 많다. 왜냐하면 의식을 하든 안 하든 누구나 자기 자신이 차별 받는 사회적 소수자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보다 쉽게 소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뜬구름처럼 머릿속에 머물던 나만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견해이나, 영화 <주토피아>를 보고 나니 확신이 생겼다.


소수자의 의미는 절대적인 수가 작다는 뜻이 결코 아님은 알 것이다. 오히려 그 개체 수로는 다수에 속하는 토끼 주디는 영화에서 소수자로 그려진다. '작은 동물'은 경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과 싸워서 결국 경찰이 되었는데도 다른 동물들과 동등하게 대우 받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 모습에서 주디의 억울함에 공감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주디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깊이 공감을 했던 나는 당연히 주디를 '약자'라고 느꼈고, 주디의 상황과 감정에 계속해서 '나'를 대입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과연 누가 약자이고 누가 강자인가?


'약자'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주디를 차별하는 존재들은 상대적으로 주디보다 '강자'의 입장에 있을까? 강하고 약하고가 아니라, 편견을 가진 자가 차별을 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사회적 소수자'를 만드는 주범인 '편견'을 휘두르는 걸까? '강자'들만 편견을 도구로 상대를 상처 입힐까? 강자와 약자가 정해져 있을까?

무뚝뚝하지만 대원들의 생일까지 잊지 않는 이 츤데레 서장님은 혹시 순전히 토끼를 걱정해서 임무를 맡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


주디가 부딪힌 편견은 다른 동물로부터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토끼들도 토끼가 경찰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게다가 주디가 주토피아 중심부로 발령이 나자,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디 아빠는 주토피아에 가득한 포식자들에게 사랑하는 딸이 위협을 당하지나 않을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도구들을 건넨다. 언제나 용감하게 다른 생각을 꺼내놓던 주디도 전부를 마다하지는 않고 여우스프레이를 받아들고 열차에 올랐다. 두려움은, 주디에게도 없지는 않았다.



사회적 소수자는 결코 약하지 않다.


시장 비서 역할에 작고 순해 보이는 양 벨 웨더는 '작은 동물'들의 대변인인 셈이지만,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육식동물들을 역차별하는 장본인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적 소수자가 결코 약하지 않은 까닭 가운데 첫째는, 사회적인 지위가 어떻건 간에 모두 하나씩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약자도 약하지 않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사회적 약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잘 모르겠다. 힘은 있다가도 사라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다.



두번째 증거는, 영화 속 육식동물의 모습이다. 이들은 수적으로도 분명하게 소수자다. 영화 속에서 피식자들의 두려움의 대상인 육식동물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잘못이라면, 육식동물로 태어났다는 사실일 것이다. '강자'라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 이들이 누구보다 '약자'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소수자가 결코 약하지 않은 세번째 까닭은, 주디가 잘 보여주었다. 그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당돌함! 자세한 언급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으니 굳이 담지 않아야 겠다. 스토리 내내 주디는 자신이 결코 약하지 않음을 증명해주어서 보는 이를 통쾌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한다.


편견으로 똘똘 뭉쳐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변화를 이루어 낸 주디가 다른 동물들과 달랐던 점은, 스스로 편견을 믿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여우에게 상처를 입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기억이 주디를 두렵게 만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주디는 그 아이가 "여우"라서 그렇게 못됐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토끼"라서 당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엇에 대한 편견이라도 "나 자신"이 믿지 않으면 편견은 없는 것이다. 외부의 무엇과 싸우기에 앞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두려움도 결국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스스로 굳게 믿는 "편견"에서 나온다. 미스터 빅이 했던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두려움 뿐"이라는 말도, 자기 자신을 가장 두려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두려움 뿐이죠."


변화의 열쇠는 당신이 쥐고 있다.



영화 <주토피아>는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변화'를 이야기한다. 세상을 바꾸는 변화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아주 잘 표현한 것 같다. 모든 동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주토피아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그곳을 살아가는 동물들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끊임없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하고 변화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어린 주디를 무시하며 공격했던 여우가 어른이 되어 변한 모습을 비춰주는 장면이 나는 인상적이었다. 물론, 주디는 놀라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한다. 거의 마지막에 주디가 닉에게 건넸던 말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변화의 시작은 당신이고 바로 나, 정확하게는 우리 모두죠.





1. "모든 것이 이뤄지는" 주토피아에서도 안 행복한 동물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 '미스터 빅'이 드디어 모습을 보였을 때, 모두의 예상을 깨는 외모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의문이 하나 생겼다.

   '저 작은 체구로 어떻게 저 자리에 오른 걸까?'

   주토피아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편견으로 의심부터 한 것이다. 그것을 밝히는 것이 내 관심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자본주의"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능성은 많고 많다.

   만약 "주토피아"에서도 행복하지 않은 동물이 있다면, 나처럼 이렇게 편견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동물들일 것이다. 세상이 모든 것을 허락해도, 스스로가 허락하지 않으니 아마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2. 진정한 배려란 무엇일까?

- 나는 이 장면에서 동화 <여우와 두루미>가 생각났다. 의자는 적당한 사이즈로 준비하고 음식은 그렇지 않은 것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고 주토피아의 다른 풍경들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의자는 있었는데 식기구는 준비된 게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두더지들이 자신들에게 딱 맞는 크기의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봐야 한다. 그러면 각이 나오니까. 배려를 할 때도 상대를 먼저 알아야 어떻게 해야할지 보이는 것 같다. 배려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사회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각자에게 맞는 문, 우리에겐 이런 사회가 필요하다.
'다름'에 대해 화를 내지 않고 기다려주는 것


3. 과연 우리 사회에서 '최고'는 누구일까?

- 통쾌한 주디의 성공에 대해 "영화 주인공이니까 가능했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가 '나는 안 돼'라고 생각한다면 주디는 "포기하지 마!"라고 귀에다 대고 소리쳐줄 것만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변한다. 그리고 변해야만 한다. '지금이 아닌 어떤 것'을 찾는 사람에게 처방하면 좋을 것 같은 동화책이 하나 있는데 제목이 <두더지 딸 신랑감 찾기>이다. 두더지의 신랑감으로 두더지가 아닌 어떤 것을 찾지만 그 존재에게 더 강한 것, 더 강한 것을 따라가보니 결국 두더지가 최고였다는 이야기다. 긴 글을 통해 담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당신이 세계 최고라는 말이다.



*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세상의 모습을 아주 완벽하게 그려준 영화 <주토피아>.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아이들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또 보고 싶은 정도로 멋진 영화! 꼭 보세요. 열 번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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