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골뱅이 한 접시의 위로

하루를 구한 한 그릇

by 햇살 드는 방

때로는 열 마디 말 보다 한 그릇의 음식이 더 큰 위로가 된다.추운 날 빨개진 코끝 녹이며 후후 불어 먹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처럼.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마주한 땀 뻘뻘 나게 얼큰한 김치찌개 한 냄비 같이. 어떤 날, 어느 순간의 음식은 그렇게 토닥토닥, 괜찮아 괜찮아, 안아주고 달래주는 위로가 된다.


오늘의 나에겐 골뱅이 한 접시가 그랬다.


여리고 예민한 큰딸은 시험 기간만 되면 더더욱 조심스러운 존재가 된다. 오늘도 유리알 같은 그녀는 투명하게 속을 내비치며 짜증과 투정으로 “나 힘들어!! 나 불안해!! “를 마구 발사했다. 고2 첫 기말고사의 시작을 하루 앞둔 날이니만큼 최대한 받아주고, 이해해 주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 청소년이 발사한 세 살짜리 같은 생떼 폭탄을 받아낸 뒤엔, 나도 모르게 ‘자괴감’의 파도에 휩쓸리곤 한다. 우리 집 청소년의 ‘금쪽이적 언행’이 그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나는 도대체 언제, 무엇을, 어떻게, 얼마큼 잘못한 걸까.


태교보다는 야근에 더 힘쓴 것? 애착 형성기라는 만 36개월까지의 육아를 할머니와 외할머니 품에서 돌려 막기 한 것? 전업맘이 된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게 된 순간 동생을 낳아버린 것? 원칙과 강단 그리고 일관성의 삼박자를 갖춘 엄마가 되지 못한 것? 첫 아이란 이유로 그저 모든 게 어설프고 어려워 갈팡질팡 했던 것?


그런 날엔 후회와 회한의 질문이 끝도 없이 몰려온다. 그리고 결론은 언제나 ‘다 내 잘못이네’와 ‘아냐, 난 할 만큼 했어!’의 중간 어딘가쯤에서 엉거주춤 멈춰 선다. 난 정말 최선을 다했을까. 난 너를 제대로 이끌고 있는 걸까. 자신도 확신도 없다. 엄마 나이 열여덟이면 이제 내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왜 나는 아직도 작은 바람에도 갈팡질팡 흔들리고 마는 걸까.


“걸으러 나왔어?”

자괴감의 구덩이로 빠져드는 나를 건져 올린 건 신랑의 별 거 아닌 한마디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순간 배수구 뚜껑이 열린 것처럼 쏴아하고 속상한 마음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래, 나 혼자 낳아 기른 아이 아니지. 여기 동지 하나 있었지. 황량한 전쟁터에 혼자 남겨진 줄 알았는데 바로 옆에 듬직한 전우 하나가 손 내밀고 서있었던 것이다.


그 손을 덥석 잡고 속상함을 토로하고나니 속이 좀 뚫린다.

“아, 몰라. 나 오늘 수업 마치고 맥주 한 캔 마실래!“

선언하듯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우는 나의 외침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퇴근하고 나온 거실에서 새콤 달콤 맛있는 냄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햇살이 일병 구하기 메뉴로 준비해 봤어.”

나를 구해줄 메뉴, 골뱅이 무침과 차가운 맥주.

“소면은 부담스러울까 봐 오징어 실채를 넣었어.

야채는 다양하고 많을수록 좋으니 당근부터 깻잎까지 골고루 냉털 했고, 대파는 억세고 딱딱한 심지는 빼고 부드러운 부분만 골라 썰었어. 아, 양념? 설마 시판 양념이라 생각하는 거 아니지? 여러 레시피들 참고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양념이라고! 어때? 먹을만해? “


먹을만하냐고? 그럴 리가. 이건 먹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감동과 충격의 맛이다.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이 뻥 뚫리며, 하루의 피로와 설움을 순식간에 녹아내리게 하는 따스한 위로의 맛. 골뱅이 무침이 건네는 위로에 내 마음은 금세 무장해제된다. 오늘 좀 속상하면 어때?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뜨겠지. 지금 좀 삐걱대면 어때? 맛있는 거 먹고 푹 자고 일어나 다시 시도해 보면 되는 거지. 골뱅이 한 접시에 나는 긍정나라 행복시민이 되어 시원한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신랑표 특제 소스의 황금 레시피가 궁금해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둔다. 이 메뉴는 그만의 히든카드로 남겨두고 싶으니까. 언젠가 또 속상하고, 기운 빠지는 날, “도와줘요, 전우여!”를 외치며 손 내밀면 어느새 뚝딱하고 눈앞에 나타나줄 비장의 무기. 누군가 나의 소울푸드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오늘의 이 특별한 ‘골뱅이 무침’을 꼽을 것이다. 이것은 한 그릇 진한 위로의 맛. 마음을 녹이고, 하루를 다독이는 든든한 응원의 맛.


엄마 경력 18년, 여전히 일병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나를 구한 것은 열 마디 말도, 한 번의 눈빛도 아닌 한 그릇의 음식이었다. 그 음식에 꾹꾹 눌러담은 당신의 단단한 마음이었다.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요?
“수고했어, 오늘도! 짠!”



*커버 이미지는 제가 찍은 사진을 챗gpt가 그림으로 바꿔주었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린이날엔 이탈리안 브레인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