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 드는 방 Jan 09. 2025

500원짜리 동전을 준 그이는 누구였을까?

박완서 에세이 <나는 누구일까> 이어 쓰기


 일전에 용산 쪽에 사는 이가 나를 초대했는데, 그쪽 지리에 어두운 나를 위해 남영역까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주겠다고 했다. 시간이 안 맞는 경우 몇 번이라도 역 주변을 돌겠노라고 하면서 차 번호랑 핸드폰 번호까지 알려주었다. 나는 남영역이라는 데는 처음 가보는 데라 어디서 어떻게 갈아타야 되나 전철 노선표를 펴놓고 꼼꼼하게 예습을 하고 나서 떠났다. 요즘처럼 주차 사정이 나쁜 때는 그저 차 얻어 타는 쪽에서 먼저 가 있는 게 수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약속 시간보다 15분가량 먼저 남영역에 도착했다. 나는 만 원짜리 회수권을 쓰는데 그게 그때 마침 다 되어 표는 되돌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큰일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군데 서 있는 것도 거치적댈 정도로 역 주변의 인도는 좁고도 복잡했다. 20분, 30분이 지나도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이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아마 이럴 때 써먹으라고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지 싶어 번호를 적어놓는 쪽지를 찾았다. 그 쪽지를 지갑에 찔러 넣은 생각은 나는데 핸드백 속에 지갑이 없었다. 나는 지갑을 빼놓고 핸드백만 들고 나오기를 잘하지만 소매치기를 당했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어서 우선 집에 전화를 걸어봐야 할 것 같았다. 전화카드도 핸드백 속에 없길래 잔돈을 찾았다. 워낙 큰 백이고 안주머니와 겉주머니까지 있는지라 잔돈푼이 숨어 있을 데가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넣고 휘저어봐도 십 원짜리 한 푼 만져지지 않았다. 시간은 약속 시간에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나 경과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기다리는 걸 단념하고 남영역사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에 자리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핸드백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쏟아놓고 바닥까지 훑어도 어쩌면 땡전 한 푼 안 나왔다. 복잡한 역사 안에서 내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내친김에 수첩 갈피까지 뒤지고 나서 쏟아놓은 것들을 수습했다. 그때까지도 가까운 은행만 찾으면 현금카드로 돈을 찾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드도 지갑과 함께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더럭 겁이 났다. 나를 이 낯선 곳에 세워놓고 마중을 나오지 않은 이에 대해서도 분노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지갑도 궁금하고 궁금한 것 천지인데 달아볼 방법이 없었고, 첫째 돈 없이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아무런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 65세만 넘으면 노인증이나 주민등록록증만 보이면 공짜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돈을 버는 노인이니까 돈 내고 표사서 다니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야말로 그따위 잘난 척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공짜 표를 청하러 창구로 가려다 말고 생각하니 노인증은 아예 발급도 안 받았고 주민등록증도 잃어버린 지갑 안에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에 벼락 치듯 내 맹한 정신을 때렸다.


 여기서 우리 집이 도대체 몇 리나 되며, 방향은 어느 방향일까? 여기도 같은 서울 시내일까? 나는 갑자기 남영역 주변이 서울의 어떤 곳과도 닮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길을 잃은 게 서울이 아닌 어느 먼 낯선 도시처럼 여겨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여기가 어딘지 알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빨리 집안 식구 누구 하고라도 연락이 닿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수로 전화를 걸 것인가.


 남영역 앞 인도에는 전화 부스가 열 개 가까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현금으로 걸 수 있는 데를 지키고 서서 누군가가 돈을 남겨놓은 채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나오는 데가 없나 잔뜩 눈독을 들이고 기다렸다. 그날따라 아무도 거스름돈을 남겨놓지 않았다. 길에 나가면 가끔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독자를 만나게 된다. 돈 남은 공중전화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자 남은 희망은 단 하나, 누가 나를 알라보는 거였다. 나는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가 승객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계단 밑에 턱 쳐들고 서서 누가 나를 알아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누군가가 "박완서 씨 아니세요?"하고 말을 걸어온다면 그렇다고 하고 나서 500원만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한테 아는 척을 안 했다. 혼잡한 통로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모두 귀찮다는 듯이 밀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거기서 어딘지 종잡을 수 없는 아득한 마음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더 막막한 무서움증으로 변했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카드나 주민증 없는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때 내가 남영역에서 잃은 건 지갑도, 길도 아니라, 명함만 한 주민증이나 카드에 불과한 나 자신이었다. 다행히 역전엔 빈 차가 많이 늘어서 있었다. 선금 없이 집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러나 나는 선뜻 타지 못하고 기웃대며 카폰_car phone_이 있는 차를 찾았다. 전화를 통해서라도 내 자식이건 친구건, 아무튼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기 전엔 그냥 집으로 가봤댔자 집에 아무도 없을 수도, 혼자 문 따고 들어간 집에 돈도 지갑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박완서 선생님!”

 누군가 뒤에서 덥석 내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마침내 카폰이 있는 택시를 발견하고 구세주라도 만난 심정으로 반갑게 손을 들려던 참이었다.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방해로 내 몸은 허수아비처럼 휘청이다 중심을 잃었다. 이대로 넘어지려나 싶은 순간, "선생님, 괜찮으세요?" 아까와 똑같은 목소리가 한 번 더 귓가에 울리더니 이번에는 그 누군가가 내 양어깨를 꽉 움켜 잡는다. 그 순간 눈앞에 택시 꼬리가 스쳐 지나간다. 한참을 애타게 기다렸던 카폰 있는 차를 눈앞에서 놓치고 만 것이다. 나는 화가 나서 그만 그이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뒤돌아 보았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여인이 서있었다.


 나를 알아본 것으로 보아 나의 독자일까? 계절에 맞지 않게 두꺼운 코트와 털모자를 쓴 그이는 동그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선생님, 한참 고생하셨죠? 이제 걱정 마세요. 제가 왔어요!" 대관절 이 여인은 누구길래 나의 남영역에서의 반나절의 고생을 알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걱정 말라느니 제가 왔다느니, 이 확신에 찬 말들의 근거는 무엇인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이의 두 눈에서는 반가움을 넘어 감격스러움마저 느껴졌다. "누구시죠?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지요?" 여인의 활짝 웃는 얼굴에 어느새 화는 누그러지고 궁금함이 목소리가 되어 나왔다. "선생님 글이 너무 갑자기 끊겨서요. 그 뒤로 어찌 된 건지, 집에는 잘 가신 건지 너무 궁금하고 걱정이 됐어요. 무사히 귀가하셨길 바라며 500원짜리 동전을 책갈피로 꽂아놓고 책장을 덮었거든요. 그런데 책장을 덮고 고개를 들어보니 이곳에 와있었어요! 여기 남영역 앞 택시 정류장 앞에요. 저도 진짜 놀랐어요. 그렇지만, 아무튼, 정말 다행이에요! 여기요. 이 책이에요!" 들뜬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속사포처럼 내뱉더니 눈앞에 불쑥 책 한 권을 들이민다. 푸른 산과 알록달록한 꽃인지 사람인지가 유화로 그려진 책 표지에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표지의 꼭대기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박완서 에세이. 내가 처음 보는 나의 에세이집. 잃어버렸던 지갑이 지금 당장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고 해도 이보다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어서요!" 여인이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있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준다. 따끈하고 동그란 그 작은 물체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살며시 편 손바닥 위에는 은빛 학 한 마리가 보였다. 오백 원. "이걸 왜? 어떻게?"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코 앞에서 횡설수설 떠들던 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디로 간 건지 찾아보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아도 남영역 앞 인도에는 모르는 이들의 발걸음만 분주했다. 그이가 남기고 간 오백 원짜리 동전을 다시 내려다본다. 반짝이는 은빛 학을 뒤집어보고 나는 한참을 시간이 멈춘 듯 움직이지 못했다. 암호 같은, 모스부호 같은 그 숫자만이 내 눈앞을 어지럽힐 뿐이었다. 2024, 500.


박완서 선생님이 에세이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 실린 ‘나는 누구일까’에 제 맘대로 이어 써본 글입니다. 선생님의 글에 누가 될까 저어 되는 마음에 며칠 망설였지만, 어쩌면 이렇게 독자들이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뒷이야기를 이어가 주기를 바라고 뚝 끊기듯 열린 결말로 마무리하신 글이 아닐까 싶어 즐거운 마음으로 이어 써보았습니다.

 “선생님, 그곳에서 그리웠던 이들과 함께 평안하시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