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우주대스타 탄생기
거려천지 우리 행락 광대행세 좋을시고
그러하나 광대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치레 둘째는 사설치레
그 지차 득음이요 그 지차 너름새라
신재효의 ‘광대가’ 중
조선 후기 신재효(1812~1884)는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했다. 그는 품격 있는 광대놀음을 위해 4대 법례를 제시했는데, 이 원리를 지속적으로 연마하면 비로소 ‘명창’이라 불리었다. 당시 명창은 우주대스타였다. 조선의 우주대스타가 되려면 인물과 사설, 득음, 너름새(연기)를 갖춰야 하는 것. 그런데 판소리의 4대 요소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째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 오묘하게 맞닿아있다. 색동 보디슈트를 걸친 빼어난 용모, 분명하고 완연한 표현력, 타고난 목성과 구경꾼들 웃게 하는 너름새까지….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지구별로 쿵 떨어졌다. 하필 떨어진 곳이 한국이라며 대중은 즐거워한다. 현재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함께한 ‘범 내려온다’ 온스테이지 영상은 유튜브 조회수 1,122만 회를 달성했다. 잠깐의 이슈라고 생각했건만, 한국관광공사의 홍보 광고인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로 다시금 뜨겁게 회자되고 있다. ‘광대치레’를 갖춘 21세기 우주대스타는 ‘마당’이 아닌 ‘유튜브’의 힘을 빌려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언젠가 이날치의 보컬 안이호에게 가장 재밌는 댓글이 뭐냐고 물었다. ‘조선의 클럽에 온 걸 환영한다’라는 댓글을 보고 한참 웃었단다. 생각해 보자. 조선에 클럽이 있었다면? 북과 장구가 장단을 주도하고, 소리꾼은 창(唱)을 불렀을 테다. 조선의 내로라하는 춤꾼들이 모여 율동적으로 몸을 흔들었겠지. 딱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모습이다. 이들에게 ‘조선의 힙스터’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이날치 음악이 전통 판소리에 기대고 있어서다.
이제 21세기 우주대스타 탄생기를 공개한다. 이야기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날치’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는 이들의 ‘애매모호한(ambiguous)’ 이야기를 파헤쳐보겠다.
광대 놀음이 어찌 아니 어려우냐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자
신재효의 ‘광대가’ 중
지난해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함께한 ‘범 내려온다’ 영상이 그야말로 화제가 됐습니다. 사실 장영규와 김보람의 작업을 오랜 기간 봐왔던 저에겐 그리 생소한 콘텐츠는 아니었는데요. 공연 예술에 관심 없던 지인들까지 “요즘 ‘이날치 춤(?)’에 푹 빠졌어”라고 해서 놀랐습니다. 2020년은 좀 특별한 해였나요?
김보람 사실 작년에 가장 기억 남는 일은 방배동에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연습실을 차린 거예요. 갑작스럽게 코로나19가 덮쳤던 시기였어요. 주변에선 왜 힘든 시기에 굳이 연습실을 차리냐고 했습니다. 당분간 계속 공 연이 취소될 것 같아서 안정적인 연습 공간이 있으면 했어요. 그때는 ‘범 내려온다’가 뜨기 전이었죠.
장영규 매년 많은 일을 해오며 살았는데 지난해에는 갑작스럽게 큰 주목을 받았네요. 늘 해오던 일들이 하나로 엮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요.
김보람 님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텔레비전에서 가수 현진영을 보고 자연스레 춤을 따라 추기 시작하셨죠. 요즘 연예인들까지 ‘범 내려온다’ 댄스 영상을 올리고 있던데 혹시 보셨나요?
김보람 그런가요?
이제는 김보람의 춤을 따라 추는 대중을 보면 요상한 감정이 들 것 같습니다.
김보람 연예인을 꿈꾼 게 아니니까 그런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원래 해오던 작업 방식에 더욱 몰두하고 있어요. ‘범 내려온다’는 3~5분 길이의 안무잖아요. 본래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작품들은 1시간이 넘죠. 긴 호 흡의 작업이 저에겐 더 가치 있어서 그것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으려고 해요.
장영규 님은 애정하는 ‘밴드 활동’을 다 시금 시작했어요. 밴드 활동의 시작점을 짚는다면, 어어부 프로젝트 밴드를 만든 1994년부터인데요. 당시 원일(현 경기시 나위오케스트라 예술감독)과의 인연으로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고 하셨죠. 원일과는 여전히 음악 동료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데, 1990년대와 비교 했을 때 대화 주제가 어떻게 바뀌었나요?
장영규 그때는 국악이 미지의 세계였어요. 원일을 만나서 전통음악에 눈을 떴죠. 이후 국악 하는 여러 친구들과 이런저런 작업들을 이어왔는데요. 지금은 그와 얘기하다 보면 국악 전공생은 아닌데 ‘반(?)국악인’이 된 것 같다고나 할까요.
장영규(1968~)가 음악계에 첫 눈도장을 찍은 건 1990년대 중반. 백현진·원일과 함께 ‘어어부 프로젝트’➊를 결성한 것이 계기다. ‘어어부’는 ‘고기 잡는 사람’ 어부(漁夫)와 ‘고기의 아버지’ 어부(魚父)의 합성어. 꺽꺽대며 절규하던 이들의 기이한 음악은 방송 출연 한 번 없이 입소문만으로 화제를 모았다.
괴짜 음악인들의 만남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홍대 앞에 살던 장영규에게 한 지인이 백현진(1972~)을 소개했다. 당시 백현진은 홍익대 조소과에 합격한 상황이었다. 백현진은 장영규의 집에 들락날락하며 음악을 만들었다. 둘은 만들어 놓은 음악들을 전시 오프닝에 사용하곤 했다. 홍대 근처에 연습실이 있던 원일(1967~)과 연이 닿으며 어어부 프로젝트가 본격 시작됐다. 원일은 첫 음반 ‘손익분기점’(1997)까지만 함께했고, 이후 장영규와 백현진 두 명이 활동을 이어갔다.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을 두고 “퍼포먼스의 성격이 강한 음악”이라고 하더군요.
소리는 물론 무대와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많아 서 공연 요소로 가져오다 보니, 보는 이에겐 퍼포 먼스가 강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특히 백현진이 그런 걸 많이 시도했죠.
‘보는 음악’과 ‘듣는 음악’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날치 음악의 인기도 유튜브와 같은 영상물을 통해, ‘보(며 즐기)는 음악’을 갈망하는 동시대 대중의 열망이 채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보는 음악’에 대한 고민은 씽씽 시절부터 시작된 것 같아 보이고요.
그렇게 따지면 어어부 프로젝트 때부터 훈련이 된 거죠. 지금은 보면서 듣는 게 필수 요소가 됐어요.
장영규 님도 ‘보는 음악’을 즐기나요?
음악을 컴퓨터로 듣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환경에 놓여요. 굳이 ‘난 시각적인 요소를 제하고 듣겠어!’라고 하진 않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어어부 프로젝트를 할 때는 “그냥 음악으로 예술이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밝혔죠. 비빙을 하면서는 “음악 신(scene) 에 대한 고민”, 씽씽을 하면서는 “지속가능한 음악을 하는 방법”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했어요. 마침내 모든 게 갖춰진 이날치 밴드가 탄생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술을 향한 순수한 마음으로 음악을 하던 어어부 시절이 그립진 않습니까?
지금 시기에는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뭐 10년이 지나서 마음이 바뀌면 다시 그렇게 할 수도 있죠. 정답이 있을까요? 그냥 지금 관심 있는 걸 해나가는 게 좋습니다.
‘수궁가’로 클럽을 들썩이다
2019년 1월, 홍대 ‘채널1969’ 클럽에선 ‘이날치’➋ 데뷔 신고식(?)이 펼쳐졌다. 장영규가 이끌었던 ‘씽씽’➌ 밴드를 그리워하는 많은 공연 관계자가 클럽을 찾았다. 공연 이후 2019년 현대카드 언더 스테이지 ‘들썩들썩 수궁가’ 공연 기회를 얻었다. 밴드를 하는 입장에서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아직 앨범 발매도 안 된 이날치에게 공연 제안이 온 건 놀라운 일이었다.
이날치 결성 계기는 2018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된 양정웅 연출의 음악극 ‘드라곤 킹’이다. 음악을 담당하게 된 장영규는 현재 이날치 멤버인 안이호·권송희·신유진·이나래와 무대를 꾸몄다. 3시간이 넘는 전통 판소리 ‘수궁가’를 토대로 하지만, 주요 대목을 추려 소리꾼이 나눠 불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밴드의 형태만 있었고 밴드를 부르는 명칭은 없었다. 얼마 후 밴드명을 붙이며 이들은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날치’는 조선 후기 명창 이날치(1820~1892)에서 따온 것이다.
이날치의 밴드 구성은 좀 독특하다. 두 대의 베이스와 한 대의 드럼은 리듬을 주거니 받거니, 네 명의 소리꾼은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한다. 장영규는 화성이 없는 판소리처럼 밴드 음악에도 화성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판소리가 소리꾼과 장단악기인 북으로만 진행되듯, 리듬악기인 베이스 두 대(장영규·정중엽)와 드럼(이철희)이 함께하는 조합을 생각해냈다.
현재 이날치는 ‘얼터너티브 팝밴드’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본인이 처음 그 단어를 사용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대중음악 신에서 소비되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우리 음악의 많은 부분이 판소리에 기대고 있습니다. 전통음악이 다른 장르와 만나 새로운 음악이 탄생했을 때, 그 음악을 ‘퓨전’이나 ‘크로스 오버’라고 규정짓는 것이 싫었어요. 우선은 방어적인 마음으로 ‘팝’이란 단어를 붙였습니다.
현재 어느 간격으로 음악을 발표하나요?
딱히 정하진 않았어요. 처음 음반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멤버 중 권송희 씨가 임신했어요. 출산할 때까지 음원을 하나씩 발표하기로 했고, 출산 후 활동을 시작하자고 계획을 세웠죠.
이날치 작업 방식이 궁금합니다. 한 음악이 탄생하기까지의 진행 과정을 알려주세요.
초반과 지금은 작업 방식이 많아 달라졌는데요…. 처음에는 우선 리듬을 만들었어요. 리듬과 베이스 틀이 잡히면 어울리는 판소리 대목을 찾았습니다. 수없이 많은 대목을 불러보면서 그 리듬과 맞는 걸 찾아냈죠. 대목 있는 가사를 가져와 현재 대중음악에 있는 구조로 변환했어요. 예를 들어 훅(hook)이나 후렴구가 만들어지도록 구조를 변경하는 거죠. 그 뒤에는 보컬이 어떻게 나눠 부를지를 정한 뒤 곡을 완성합니다.
➊‘어어부 3인방’은 21세기 한국예술계를 이끄는 삼두마차가 됐다. 이날치에서 베이스를 담당하는 장영규는 영화음악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9년 ‘링’을 시작으로 ‘반칙왕’ ‘복수는 나의 것’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전우치’ ‘도둑들’ ‘은밀하게 위대하게’ ‘암살’ ‘부산행’ ‘곡성’ 등 굵직한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안은미와의 협업으로 무용계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2015년에는 국립무용단 ‘완월’의 연출을 맡았다. 백현진은 음악·미술·문학·영화를 오가며 일하고 있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작가로 선정됐고, 최근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오상무 역으로 화제를 모았다. 원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거쳐 현재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예술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현대예술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이들의 뿌리를 찾아내려가 보면, 그곳에는 ‘어어부’가 있다.
➋ ‘이날치’라는 팀명은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이날 치에서 따왔다. 장영규는 “이날치가 날치처럼 줄을 잘탔는데, 노래도 잘 하고 고수도 잘 했다는 거예요. 이름의 뉘앙스가 마음에 들어 따왔죠.”라고 밝혔다.
➌ 장영규는 밴드 활동에 많은 애정을 보여 왔다. ‘어어부 프로젝트’에 이어 ‘비빙(Be-Bing)’과 ‘씽씽(Sing Sing)’ 밴드를 만든 장본인. 비빙은 국악기를 다루지 만 국악을 연주하지는 않았다. 국내 주요 극장을 중심 으로 활동을 펼쳤지만, 장영규는 “음악의 유통도 원활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이후 경기소리를 하는 이희문과 연이 닿아 ‘민요 밴드’ 씽씽을 만든다. 민요와 록을 결합한 씽씽은 국내 최초로 미국 라디오 방송 NPR의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어딜 가도 잘 노는 무적함대 같았던 씽씽은 지금은 해체됐다.
전남 완도에서 자란 김보람(1983~)은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공부를 싫어했다”고 솔직히 말한다. 소년은 TV에 나온 춤을 곧잘 따라 췄다. 자신이 춤 출 때면 사람들은 신기한 듯 쳐다봤다. 고등학교 2학년, 서울로 상경해 춤을 배우겠다는 결심이 섰다. 예측대로(?) 부모님 반대에 휩싸이고야 말았다. “1년만 고생하면 TV에 나올 것이다”라고 호언장담 하며 속전속결로 서울에 왔다. 얼마 되지 않아 백업댄스 팀에 입단했고 마침내 가수 채정안의 메인 댄서로 춤추게 됐다. 이후 엄정화·이정현·코요테 등 당대 스타 가수의 백업댄서로 일했다.
원하던 춤을 추는데도 뭔가 내키지 않는 마음. 그는 마돈나나 마이클 잭슨 뒤에서 춤을 추면 갈증이 풀릴 것만 같았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비자를 받으려 했지만 당시 ‘백댄서’라는 직업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학생 비자는 좀 얻기 쉬울 것”이란 얘기를 해줬다. 스무 살의 김보람, 갑자기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백업댄스 팀 프렌즈에서 7년간 방송댄스를 춘 일화는 유명합니다. 지금의 ‘현대무용가 김보람’에게 미친 영향이 있을 텐데요.
긍정적인 건… 그 시기에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아무래도 방송을 통해 ‘보이는 춤’이니까요. 지금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때 했던 춤들이 몸에 남았고요. 부정적인 건… 별로 없는데요. 보여 지는 것에만 노출된 삶을 당시 많이 목격했기 에 그것에 대한 로망이 없어요. 그 경험이 요즘처럼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어도 오롯이 제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요인이 된 것 같아요. 방송 노출도 자제하려고 합니다.
2003년 서울예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발레나 한국무용, 현대무용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무용과에 입학한 비결은 무엇인가요?
춤의 기본은 알고 있으니까요. 현대무용 영상을 찾아보며 저에게 맞는 동작을 따라 했어요. 학교에 붙으면 좋겠지만 기대는 없었는데, 장학금까지 받으며 다녔네요. 대학에서 만난 고 김기인 교수님을 향한 존경심을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죠. 교수님은 출중하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자신이 대단한 걸 인식하지 않으셨죠. 제 눈에는 춤을 마냥 사랑하는 소녀처럼 보였어요.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쩌면 저렇게 순수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교수님에게 춤 그 자체에서 오는 순수함을 배웠어요.
김설진 안무가의 추천으로 몸담게 된 안성수 픽업그룹 활동 시기도 짚어 봐야 할 것 같네 요. 안성수는 클래식 음악을 탁월하게 사용하는 안무가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안성수 선생님에게 받은 음악적 영감이 많아요. 이전까지는 제가 그냥 댄서라고 생각했어요. 선생님과 함께하면서 구체적으로 안무하는 방식을 익혔습니다.
고집 속에서 꿈틀댄 춤의 언어학
‘무용수 김보람’이 처음 안무를 시작한 건 김기인 교수의 제안 덕이다. 후배들이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한 춤이 필요했고, 김 교수는 김보람에게 안무를 구성해보라고 시켰다. 학교 선배인 김설진 안무가가 그에게 “기왕 만들었으니 대회에 출품해보라”고 권했다. 이후 ‘CJ영페스티벌 최우수작품상’ ‘올해의 춤비평가상’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최우수작품상’ 등 굵직한 상에 이름을 올렸다. 그저 춤추는 친구들과 모여 함께하는 것이 즐거웠다. 상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작은 보상일 뿐 이었고. 그렇게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탄생 했다.
열정이 힘이었던 시절, 무용계 온갖 상을 휩쓸었지만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백업댄서 출신의 무용수가 무용계에 등장하자 비난과 찬사가 동시에 쏟아졌다. ‘새롭다’며 호평하던 사람들은 금세 ‘새롭지 않다’며 혹평했다. 기존 작품을 올릴 기회를 주기보다는, 늘 새로운 것에만 열광하는 무용계. 그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잡았다. 1년 동안 신작을 포기하고 기존 작품의 재공연 기회만 찾아다녔다.
2007년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창단 시 롤 모델로 삼은 안무가가 있나요?
이스라엘의 바체바 댄스 컴퍼니(Batsheva)처럼 국민에게 사랑받는 무용 단체가 되고 싶어요. 사실 작업 방식에 대한 영향은 많이 안 받는 것 같 아요. 요즘은 미야자키 하야오(애니메이션 감독)나 일론 머스크(테슬라CEO) 같은 사람이 매력 적이에요. 수십 년간 고집해온 꿈을 이뤄내는 모습이 멋있더라고요.
김기인 교수에게는 춤을 대하는 순수함을 배웠다고 하셨잖아요. 꿈을 좇는 사람들이 가진 태도에 마음이 동하는 편인가 보네요.
한결같은 마음으로 뭔가를 해내는 사람들이 좋아요.
단체 인지도에 크게 기여한 작품을 꼽자면?
지금 활동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 있어요. 장경민 대표와 듀엣으로 오르는 ‘공존’이란 작품인데요. 재공연보다는 초연이 많은 무용계 현상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재공연을 많이 하려면 돈이 안 드는 작품이 필요했죠. 당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장경민 대표와 같이 살아서 스케줄을 잘 맞출 수 있었어요. ‘공존’은 부르면 우리 둘이 가서 무조건 출 수 있었죠. 그렇게 하면서 컴퍼니가 유지될 수 있었고, 재공연에 대한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바디콘서트’를 통해 김보람의 이름이 공연계 에 깊게 각인됐는데요. 그런데 사실 ‘바디콘서트’도 일반 대중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지방 공연을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재작년에는 베를린에 초청되기도 했죠. 올해는 3월에 프랑스에서 한 달 동안 공연을 펼칠 계획이에요. 코로나 때문에 확실하진 않지만….
단원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나요?
저는 혼자서 연습실에 있는 시간이 많은 무용수 들을 좋아해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 사실 쉬워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혼자 하는 게 어렵죠.
잘 알려진 작품 외에도 대중에게 선보이고 싶은 작품들이 있나요?
2008년에 발표한 ‘볼레로’ 오리지널을 비롯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모아서 공연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7월쯤에 광명시민회관에 올릴 예정이니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오리지널 무브먼트를 원하면 그때 만나보시길!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던 장영규는 도통 전공에는 흥미가 없었다. 미술을 전공하던 사촌누나는 그에게 다양한 장르에 몸담은 예술가들을 소개해 줬다. 그때 만난 이불(1964~)과 최정화(1961~)는 현재 세계적인 예술가로 발돋움했다. 젊음의 시절, 그들은 홍대와 종로 일대 클럽을 휘젓고 다니며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중 무용가 안은미(1963~)는 지금의 장영규가 있게 한 결정적 인물이다. 어느 날 안은미는 다짜고짜 LP 12개를 장영규에게 던져주며 “공연에 쓸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안은미가 1991년 제1회 MBC창작무용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후 축하 공연으로 올린 ‘알라리 알라리요’.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장영규는 기존에 있는 음악을 4채널짜리 카세트로 짜집기해서 공연음악을 만들었다. 이 경험이 “지금의 음악 활동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장영규 님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음악적 재 능이 뛰어나진 않다”며 그동안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 만나며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렸다고 했어요. 그중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2인을 꼽는다면 누군가요?
장영규 백현진과 안은미인 것 같네요. 백현진과는 안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하며 둘이 좌충우돌 이것저것 해봤어요. 그런 시간을 보냈단 것만으로도 소중해요. 안은미는 저와 가장 오랜 기간 작업해 온 사람인데요. 제가 음악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준 사람이어서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 스스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진 않다”고 생각해요?
장영규 제가 잘 할 수 있는 부분만 하고 있죠. 모자란 부분이 많아요….
2013년과 2016년 ‘객석’에는 김보람의 굵직한 인터뷰가 실려있다. 2013년에는 ‘좋아하는 춤을 추지만 돈을 벌 수 없는 환경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고, 2016년에는 ‘김보람의 이상적인 협업 방식’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실제로 2013~2016년은 김보람이 무용계에서 가장 활약한 시기로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김보람은 앞선 2012년 “무용을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던 때”를 보냈다고 한다. 계속 작품을 올려도 돈을 벌 수 없는 현실에 지쳐가고 있었다. 매일같이 밤새워서 연습하는 무용수들에게 생계비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그를 괴롭 혔다. 그리고 그해 여름, 김보람은 단원들에게 단체 활동을 그만두자고 제안했다.
다시금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활동을 시작 한 계기가 뭐예요?
김보람 베를린에서 공부하던 한 기획자가 갑자기 저에게 연락을 했어요. 자신이 무용단 PD로 노력할 테니 다시 제대로 해보자고요. 그분의 도움으로 작품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셨어요. 다시 시작한 이유가 그분 때문인데… 그러다 2015년 안산문화재단 상주단체가 되면서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받았어요. 서울 너머 지역 문화 발전에도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며 좋은 협업 관계를 이뤄냈죠.
현재 컴퍼니 단원들도 정단원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좋은 협업 관계인 건가요?
김보람 메인 멤버 5~6명이 있고, 작품별로 들어 오는 멤버 5~6명이 있어요.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 그동안 정단원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는데, 앞 으로는 도전해보려고 해요. 무용수는 참 돈이 안 되는 직업이에요. 좋아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만둔다고 하면 제가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다시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협업 얘기를 해볼까요. 장영규 님이 ‘협력’과 ‘협업’의 차이를 언급하셨더군요. ‘협업’은 공동의 목표를 만드는 것이고, ‘협력’은 서로의 작업을 존중하는 것이라고요. 그럼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협업 관계일까요? 협력 관계일까요?
장영규 ‘협력’이라고 할 수 있죠. 서로 존중해야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 2016년 LG아트센터의 ‘댄스 엘라지’에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를 처음 만났어요. 제가 심사를 맡고 있었는데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바로 눈에 들어왔어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명이 추는 방식이 흥미로웠죠. 기존 현대무용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벗어나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함께하면 즐거울 것 같았습니다. 록 페스티벌 개막 공연이 있었는데 문득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떠올라서 같이 오르자고 제안했어요. 정말 즐거웠죠. 이후 이 무용단에 대한 확신이 들었고 이날치가 도움이 필요할 때 바로 생각났습니다.
김보람 협력에는 여러 가지 결과물을 도출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 있어요. 정말 원해서 만나는 관계가 아닐 수도 있고요. 좋은 태도는 서로 섞이되,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며 섞이는 것이겠죠. 서로에게 터치하기 시작하면 협력이 깨진다고 생각해요. 이날치는 우리가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줬습니다. 다양한 협력도 중요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협력이 더 중요 해요.
김보람 님은 평소 록이나 힙합, 클래식 음악까지 음악을 다방면으로 즐겨 듣는 걸로 알 고 있어요. 이날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어땠어요?
김보람 바로 ‘이 음악에 춤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연장에서 이날치 음악에 춤을 추면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이 세상에 좋은 음악은 너무 많죠. 어느 음악에 맞춰 작업하는지가 문제인 건데, 제가 결정하기보단 운명처럼 음악이 제게 오는 것 같아요. 이번 이날치와의 협력처럼.
‘범 내려온다’ 이전과 이후
‘범 내려온다’가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이날치의 시그니처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이 음악이 다른 좋은 음악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장영규 ‘범 내려온다’는 두 팀이 함께할 수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은 것 같아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예요. 이날치 음악만 두고 봤을 때는… 음… 좋은 음악이 너무 많은걸요? 한 곡만 꼽는 게 어려운데요.
‘범 내려온다’ 이전과 이후, ‘외부적 환경’이든 ‘개인적 심경’이든 가장 큰 변화는?
김보람 흔들리지 않고 원래 해오던 작업에 더욱 몰두하고 있어요.
장영규 저도 큰 영향은 없네요. 물론 이날치의 팀 활동이 많아진 건 좋죠. 내 삶이 변화된 거라 면… 수면 시간이 부족한 것?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평범한 일상 속의 하루는 어떤가요?
장영규 원래 하던 일이 되게 많은데 이날치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뺏어갈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이날치 활동이 끝나면 밤에는 개인 작업을 합니다. 건강을 생각해서 일을 좀 줄이고 있어요.
김보람 일이랑 삶을 따로 두진 않아요. 시간 여유가 있는 날에는 의상을 살피거나, 책을 보는 걸 좋아해요. 언젠가 제 작품으로 들어오는 것 들이어서. 상상력을 가지고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새롭다’라는 단어 뒤에는 늘 부담이 따르죠. 현재 많은 대중이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를 보며 “새롭다”고 말합니다. 그 뒤에 는 뭔가 더 새로운 걸 보여줘야 될 것만 같은 부담감이 존재할 것 같은데요.
김보람 30대 초반엔 그런 부담감이 많았죠. 그런데 지금은 매일이 새로워요. 어떤 의상을 입을 지, 어떤 춤을 출지, 어떻게 안무해야할지, 어떤 새로운 관객을 만날지. 대중이 우리를 보며 새로움을 느끼는 건 그건 우리의 문제는 아니에요. 지금 우리끼리 충분히 재밌으니까요.
장영규 저도 우리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익숙하지 않았던 판소리의 매력을 알아보고 사람들이 반응한 거죠.
판소리에 기초한 밴드와의 작업 때문인지 김보람 님이 전통예술의 반경에 훅 들어왔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사실 강강술래를 재해석한 ‘어긋난 숭배’, 윤석기·이승희(소리꾼)와 함께 한 ‘얼토당토’ 등 전통과 닿아 있는 작업들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현대무용 안무가들이 전통을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전통’ 은 어떤 에너지로 다가오나요?
김보람 그냥 좋아하는 소재? 저에게 전통은 클 래식 음악이나 힙합, 록과 똑같아요. ‘범 내려온다’로 주목을 받아서인지 저에게 전통 해석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더라고요.(웃음)
이날치는 앞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을 재창조하는 작업을 이어갈 건가요?
장영규 1집은 전통 판소리 ‘수궁가’에 몰두했는 데요. 앞으로는 전통 판소리보다는 우리 일곱 명만의 음악을 만들어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볼 계획이에요.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어서 밴드음악으로 변환하는 두 번의 작업 과정을 걸칠 예정인데, 결국 이게 앞으로 우리가 가야 될 길인 것 같습니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앞으로 다른 형태의 협력을 하게 된다면 원하는 장르는 무엇 인가요?
김보람 지난해 코로나 때문에 고생했잖아요. 많은 공연이 어쩔 수 없이 영상으로 대체됐고요. 이 상황에 지지 않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올해는 영상과의 컬래버레이션이 많을 것 같아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일곱 개의 레퍼토리를 자연 배경으로 촬영하고 있어요. 3월부터 7주간 매주 한 작품씩 유튜브 채널로 공유하고자 계획 중이에요.
‘예술적 수준’과 ‘대중적 수용’ 사이의 균형 잡기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중요한 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겠죠?
김보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늘 제가 원하는 예술에만 집중해왔어요. 운 좋게 김보람이라는 사람의 성향이 대중에게 이해를 받은 거죠. 좋은 예술은 대중이 알아본다고 생각해요.
장영규 그 두 개가 크게 다를까요? 어떤 방향, 어떤 목표에 따라 작업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거죠.
그럼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 이날치는 주류인가요? 비주류인가요?
김보람 현대무용은 아직까진 비주류이죠. 우리는 현대무용을 하는 단체이고요.
장영규 이날치는 지금은 주류일 수밖에 없죠.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비주류라고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 같은데요.(웃음) 다만 음악 자체가 주류인지 비주류인지는 대답하기 어려워요. ‘주류 음악’과 ‘비주류 음악’은 계속 바뀌는 거니까요. 이날치는 처음부터 대중적인 활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이날치의 음악 자체가 주류가 되어 앞으로 이런 형식의 음악이 많이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
21세기 광대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참 즐겁다. 전통 판소리가 ‘한’의 음악이었다면, 이날치의 음악은 동시대 대중에게 ‘웃음’을 준다. 국악을 지탱하는 새로운 에너지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해 9월호 ‘객석’에서 소개한 ‘21세기 얼터너티브 국악’ 특집이 떠오른다. 21세기 초에는 ‘퓨전’이라는 용어가 예술사를 읽는 중요한 단서였다. 국악 역시 다양한 장르와 융합을 모색했고, 이는 ‘퓨전국악’이라는 명칭을 탄생시켰다. 그런데 동시대 아티스트는 자신들의 예술이 단순히 ‘퓨전’으로 정의되는 것에 거부감을 보인다. 이날치는 ‘얼 터너티브 팝밴드’, 잠비나이는 ‘포스트록’, 악단광칠은 ‘코리안 샤머닉 펑크’, 추다혜차지스는 ‘펑쿳(펑크와 굿)’이란 용어를 스스로 내세웠다. 그들은 이러한 수사학을 통해 자신들의 작업이 세상 에 둘도 없는 음악임을 선언하고 있었다. 국악은 앞으로도 계속 변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들을 어떠한 카테고리로 묶을지는 굳이 걱정 마시길. 이미 이들은 주류 국악에서 빗겨선 정체성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힘은, 그러니깐 장영규와 김보람은 국악과 현대무용 ‘내부’에서 자란 힘이 아니라, ‘외부’에서 길러온 힘이다. 지금 국악계와 무용계는 이 힘을 통해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있다. 먼 훗날 21세기 한국예술을 정의한다면, 한 시대를 풍미 한 이 우주대스타들이 큰 단서가 되리라.
글 장혜선 기자(월간객석 2021년 2월호 발췌)
사진 황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