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람의 이야기
지난 5월 1일, 백상 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받은 성수연. 그는 수상 소감을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무거운 숨을 뱉었다. “안녕하세…” 짧은 한 마디를 끝내지 못하고 다시금 숨을 골랐다. 입을 자그시 오물거리다가 성수연은 말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연극배우 성수연입니다.”
喜(희)_성수연, 정말 솔직할까
18년 만에 부활한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첫 수상자로 성수연의 이름이 호명됐다. 영예로운 순간이었다. 하나 겁이 많은 성수연은 기쁨을 잘 만끽하지 못한다. 예컨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도 기쁨은 잠시. 무형의 불안이 스며든다. 이번 젊은연극상을 수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말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더 기쁘게 즐기라고. 기쁨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기가 왜 이리도 어려울까. 무대에 선 성수연은 마음을 추스르며 소감을 전했다.
“이 자리에 오는 게 많이 고민됐습니다. 많은 시청자가 저를 비롯한 후보들을 잘 모를 것 같아서인데요. 저의 공연을 봐주신 관객이 지금 혹시 방송을 보고 계신다면, 조금 즐거운 순간이지 않을까 해서 힘을 내어 왔습니다.”
진솔한 고백이었다. 수상 소감이 방송에 나간 후 이 말은 꽤 회자됐다. 한 누리꾼은 ‘솔직했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생각해보자. ‘솔직’이라는 단어는 성수연 배우와 곧잘 어울린다. 배우는 무대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분한다. 따라서 배우는 거짓말을 잘 해야 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동안 성수연이 속한 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키(VaQi)는 배우의 내밀한 경험을 무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바키 배우들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다듬어 이야기를 짓는다. 그러니 성수연의 이름 앞에 ‘솔직한 배우’라는 수식어는 퍽 조화롭다.
“비록 제 경험이어도 공연 텍스트가 되어 무대에 오르면 편집된 이야기이죠. 그래도 최대한 정직한 태도로 임하고자 노력은 합니다.”연극계에서 지속되고 있는 질문 하나. 배우들의 사적 경험이 무대라는 공적 장소에 오르면 이 이야기가 과연 보편성을 얻을 수 있을까?“배우들끼리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어요. 왜 관객이 극장까지 와서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 그런데 저는 극장에서 누구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요.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나 배우 본인의 이야기도 상관없어요.”
결국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러 극장을 찾는다. 다만 성수연은 배우가 직접 자신에 관해 발화했을 때 밀려오는 과도한 진정성이 관객에게 거리낌을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성수연이 처음 이런 고민을 시작한 건 2011년이다. 크리에이티브 바키는 2011년 두산아트랩에 ‘24시-밤의 제전’을 올렸고, 같은 해 ‘강남의 역사-우리들의 스펙 태클 대서사시’를 공연했다. 두 작품 모두 배우 개인의 이야기를 말하는 작업들이었다.
“처음에는 싫었어요. 내가 머물고 있는 일상이 싫어서 연기를 시작했는데, 왜 나의 일상을 말해야 하는지 불편했죠. 삶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무대 위에 있을 때는 적어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에 관해 확신을 가져야 관객을 떳떳이 만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리허설이 나에 대한 확신을 찾는 과정이기도 해요. 무대 위에서 내가 붙들고 서 있을 무언가를 찾아야죠. 그렇게 찾은 확신이 지속적이진 않아요. 만들었다가 무너지고, 만들었다가 무너지고…”
발화된 언어들은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에게 박제화 된다. 혹여나 시간이 흘러서 생각과 감정이 바뀌면 어떡할까. 책임질 수 있을까. 내뱉은 수많은 말들.
“생각을 밀어붙이지 않고,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열어두는 게 중요하죠. 사람의 생각은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요. 아마 관객도 그렇게 봐주지 않을까요? 아, 지금 이 순간 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구나.”
怒(로)_정당한 분노
“아주 오랫동안 화를 쌓아 놓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화를 삭이는 편이에요. 제가 제스처가 커서 화를 잘 낼 거라고 생각하는데, 웬만하면 누르려고 하죠. 그런데 이제는 화내는 방법을 좀 연습해보려고 합니다.”
성수연은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만약 불합리한 걸 참는 사람이 되면, 주변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할 것이기에. 그래서 성수연은 분노가 솟구치면, 우선 그 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정당한 화라고 생각하면 정당하게 분노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哀(애)_슬픔 이전과 후
많은 이들이 ‘비포 애프터’를 성수연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제목의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는 2014년 4월 16일 전과 후를 뜻한다. 세월호가 침몰한 그날이다. 크리에이티브 바키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그 후에 달라진 변화를 다뤘다. 이 작품에서 성수연은 죽음을 앞둔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2014년 봄, 암 판정을 받은 성수연의 아버지는 두 계절을 지나 죽음을 맞았다. 슬픔이 담긴 작품이 대표작으로 불리니 조금 미묘하기도 하다. ‘비포 애프터’는 2015년 초연했다. 2015년에 바라본 2014년과 2019년에 바라본 2014년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사람의 감정은 해마다, 하루마다, 시간마다 바뀌니까.
“다르죠. 똑같을 수가 없어요. ‘비포 애프터’는 2015에 관객과 잘 만난 작품이에요. 그런데 2016년과 2018년 재공연 때는 조금 다르더라고요. 확실히 시간의 거리가 느껴졌어요. 현재 사건의 양상도 많이 변했고, 느끼는 감정도 달라졌고, 사건을 바라보는 문제의식도 변화했죠. ‘비포 애프터’는 딱 2015년에 살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얘기였다고 생각해요. 당시 세월호 사건을 감각하던 그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다르죠.”
2014년만큼 슬펐던 때가 있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슬펐지만, 더 슬픈 건 가족의 해체였다. 몇 십 년 동안 지속됐던 일종의 우주가 이렇게 소멸되다니 스산한 마음이었다.
“저는 외동이에요. 제가 태어나면서 형성됐던 한 가족이 이렇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슬펐어요. 인간은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樂(락)_즐거움은 온전히
“소통에 있어서 주거니 받거니가 되고 있을 때 즐거워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고, 관객과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을 때 제일 신나요.”
성수연은 크리에이티브 바키에서 올린 작품들은 대부분 애정을 갖고 있다. 시간을 많이 들여 올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 바키는 공동 작업을 통해 작품을 만든다. 작품의 구상, 발전, 완성에 이르기까지 연출과 배우가 함께 치열한 토론을 거친다. 2010년 광화문 한복판에서 공연한 ‘당신의 소파를 옮겨드립니다’는 성수연에게 연극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줬다. 이 작품은 도시의 메커니즘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연출가 이경성과 크리에이티브 바키는 광화문 일대를 공연 공간으로 삼았다. 장소 특정형(site-specific) 연극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공간이 지닌 사회·역사·정치적 맥락을 탐구한다. 관객은 직접 거리를 활보하며 공연을 보고 거리에 대해 고민해본다.
“관객이 돌아다니며 공연을 보는 일종의 전시 같은 연극이었어요. 처음 작품 준비할 때는 이해가 잘 안됐어요. 최악의 경우 관객이 우리의 공연을 단 한 개도 못 볼 수 있으니까요. 나 역시 우리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요. 이게 어떻게 연극이 될 수 있을지 물음이 생겼죠. 그런데 공연 첫날에 모든 의문이 다 풀렸습니다.”
꼭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만이 관객이 아니었다. 거리의 행인과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모두 모여 연극이 되었다. 그간 학교에서 배웠던 연극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무엇보다 ‘당신의 소파를 옮겨드립니다’는 처음으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협업하는 기회를 줬다. 무언가 쌓이고 있다는 생각에 성수연은 즐거웠다. 2017년, 성수연은 손 언어를 배우고 싶어서 수화를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배리어 프리 공연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고, 저도 함께하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신재 연출과 문영민 배우와 인연이 닿아 ‘연극의 3요소’와 ‘불편한 입장들’을 올렸죠.”
작품에는 장애인 관객과 장애인 창작자 시선에서 바라보는 극장의 불편한 모습들을 담았다. 지금도 성수연과 신재 연출, 문영민 배우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음센터에서 ‘나는 인간’ 프로젝트도 함께했다. 성수연은 장애인의 극장 진입 문턱이 낮아질 때까지 부단히 움직일 계획이다. 2018년에는 조남주 소설 ‘82년생 김지영’ 오디오북 낭독에 참여했다. 83년생 성수연은 김지영의 삶이 자신과도 밀접하게 닿아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소설 낭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목소리가 컨디션에 따라서 그렇게 달라지는지 처음 알았어요. 배우의 말 하기가 관객을 상대로 훈련되어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훨씬 섬세한 접근이 필요했어요. 적합한 톤 찾는 작업이 즐거웠습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흘러있었다. 성수연은 6월 말에 공연할 ‘묵적지수’ 연습을 위해 남산창작센터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함께 이태원을 걸으며 성수연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앞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냐고.
“리서치하고 싶은 게 있긴 한데… 조금 더 확신이 생기면 그때 알려줄게요!”
표정은 즐거워보였다. 그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오래도록 가득하길. 아마 우리는 성수연의 희로애락을 듣기 위해 지속적으로 극장을 찾을 것이다. 그의 모든 고민이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니까. 관객은 그저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극장에 간다.
글_ 장혜선
사진_ 황필주(studio79)
+ 월간 <객석> 2019년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