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천하에 가득하니
이기쁨은 여름을 닮은 사람이다.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는 8월, 동대문 모처에서 이기쁨을 만났다. 토요일 이른 오전이었다. 실내는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뜨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커피잔에 담긴 얼음은 빠르게 녹아갔다. 마주 앉은 그를 보며 이 계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찬란한 젊은 날, 그를 이끈 힘은 연극을 향한 열렬한 마음이었다.
喜(희)_ 소통왕 이기쁨
“저는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희로애락을 다 느껴요. 극단을 운영하면서 ‘소통왕’이 되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나의 의견을 곡해되지 않게 전달하는 게 참 힘들어요.”
이기쁨은 연출가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소통’을 꼽는다. 그가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소통의 즐거움 때문이다. 시작은 영화였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다. 연극은 불현듯 다가왔다. 학과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연극을 접했고, 연극을 만들기 위해 소통하는 과정은 마치 놀이와 같았다.
“영화도 협동의 작업이긴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요. 촬영이 끝나면 혼자서 편집하는 시간이 길거든요. 학교 편집실에서 컴퓨터와 씨름하는 게 외로웠어요. 그런데 연극하는 사람들은 늘 함께 이야기해요. 경험 삼아 도와주겠다는 핑계로 조금씩 연극 작업에 참여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영상 촬영 방법이 잘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웃음)”
졸업 후에는 돈을 벌기 위해 모델 에이전시에서 일했다. 마음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니 몸이 빠르게 지쳐갔다.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김재엽 연출은 그런 이기쁨에게 “거기는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니 얼른 돌아오라”고 했다. 이기쁨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연극판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김재엽이 이끄는 극단 드림플레이 ‘조선형사 홍윤식’에 조연출로 참여했고, 2년 뒤에는 ‘정옥이’를 통해 연출가로 데뷔했다.
“연출하기에는 이른 나이였어요. 그런데 김재엽 연출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싶으면 우선 해봐야 된다’는 마인드를 가지셨죠.”
이기쁨은 첫 연출작인 ‘정옥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다. 함께하는 것이 기뻐서 연극을 시작했는데,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소통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김재엽 연출가가 그랬어요. 연출을 하려면 결국에는 네 집을 찾아가야 한다고요. 그 말이 맞았어요. 드림플레이가 고향 같은 극단이기는 하지만, 진정 원하는 작품을 올리려면 나만의 동료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축이 되는 팀을 꾸리게 됐어요.”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친구들이 소통이 원활하리라. 이기쁨은 한양대 출신 친구들을 모아 창작집단 라스(LAS)를 창단했다. 그리고 2010년 2월, 창단 공연으로 ‘장례의 기술’을 올렸다.
“극단 내부에서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반론에 반론을 거듭하죠. 그러다 합의되는 시점이 오는데 그때 굉장히 짜릿해요. ‘마침내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 기쁘죠.”
怒(로)_ 엉키는 시간은 화를 부른다
“요즘 의도치 않게 여러 작품들이 겹쳤어요. 어제는 막 화가 나더라고요. 저는 제 공연 보는 걸 좋아해요. 거진 모니터를 매일 하죠. 얼마 전 산울림 고전극장에 올린 ‘죄와 벌’을 보는데 좀 정리하고 싶은 부분들을 발견했어요. 관객은 모를 수도 있는 부분이었지만 조금 더 손보면 좋겠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이래저래 엉키니 미치겠는 거예요.”
그도 그럴 것이 지난 5월부터 이기쁨의 연출작이 연달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서울연극제 ‘대한민국 난투극’을 시작으로 6월에는 ‘줄리엣과 줄리엣’, 7월에는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제비씨의 크리스마스’와 뮤지컬 ‘난설’, 8월에는 ‘죄와 벌’을 공연했다. 오는 9월에는 아르코 파트너로 함께하는 ‘산책하는 침략자’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로 선정된 ‘해녀탐정 홍설록’을 선보인다. 10월에는 신작 ‘가시리’를 올릴 예정이다.
“조연출을 할 때부터 판소리 단체들과 인연이 깊었어요. 국악창작집단 타루의 ‘판소리, 애플 그린을 먹다’와 ‘오늘, 오늘이’에 참여했어요. 이후 타루의 ‘운현궁 로맨스’ 연출을 맡았고요. 2016년에는 ‘경성스케이터’로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와 연을 맺었습니다.”
세 번의 계절을 거치며 올리는 여러 작품들 중 ‘제비씨의 크리스마스’와 ‘해녀탐정 홍설록’ ‘가시리’ ‘죄와 벌’은 판소리를 토대로 한다. 이기쁨은 연극보다 음악극을 연출할 때 오히려 자유롭다고 한다. 형식의 제약을 두지 않으니 도리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어떠한 장르로 활동을 넓힐지 궁금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지극히 단호하다.
“지금 하고 있는 작품들 말고는 다른 관심을 가지면 안 될 것 같아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주어진 작업들을 성심성의껏 잘 해내는 거예요. 하고 있는 작품에 온전히 힘을 못 쓰면 화가 나요.”
哀(애)_ 슬픔이 눈물로 전이되는 순간
“최근에 울었던 적이요? 음, 한참 됐는데…”
이기쁨은 애써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끝내 생각이 나지 않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슬픈 감정을 모으는 편입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영향이 큰 것 같아요. 타인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지는 거라고 교육을 받았거든요. 어떤 일이 닥쳐도 잘 안 울게 됐어요.”
이러한 그도 억압된 감정을 마음껏 풀어 놓을 때가 있다. 공연을 보거나 책을 읽을 때가 그러하다. 잘 참던 눈물이 ‘어떠한 이야기’ 앞에서는 유독 와르르 쏟아진다.
“특히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이 나와요. 이성을 잃고 울죠. 저와 어머니가 겹쳐지면서 감정이 무너져요. 그래서일까요? 라스 초창기에는 가족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라스 초기 작품에는 가족 서사가 두드러진다. 2010년 초연한 ‘장례의 기술’(임지혜 작, 이기쁨 연출)은 아버지 장례식에서 일어나는 막장 삼남매의 소동극이다. 가족이라는 공통된, 하지만 진부할 수 있는 관심사를 맛깔스러운 대사로 풀어냈다. 2012년에 선보인 ‘서울 사람들’(한송희 작, 이기쁨 연출)은 팔도 사람들이 모인 서울의 한 고시원을 배경으로 한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젊은이들의 불안한 서울살이를 그린 작품이다.
“얼마 전에 ‘대한민국 난투극’을 재연했어요. 30대 초반에 쓴 작품인데 지금 보니까 당시 제가 했던 생각들이 불편하게 다가오더라고요. 낡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수정해 무대에 올렸습니다. 5년 동안 내 생각이 이렇게나 바뀐 게 놀라웠죠.”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연스레 변하는 생각들. 이기쁨은 이러한 생각의 형태들을 작품에 그대로 녹이고자 한다.
樂(락)_ 즐거이 공연하기 위하여
‘우리는 즐겁게 공연하는 창작집단 라스입니다.’
창작집단 라스의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위와 같은 소개글이 눈에 띈다. 라스의 구성원들은 연극은 ‘즐거운 놀이’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올해는 라스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년이라니…. 되게 오래 했네요. 그동안 무엇을 생각하거나 판단할 겨를이 없었어요. 공연 장소를 찾고,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 작품을 만들었죠. 지금도 대단한 감흥이 있지는 않아요.”
이기쁨은 극단 성장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작품으로 ‘손’과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를 꼽는다. 초연 때는 주목을 못 받은 ‘손’이 서울연극제에 참여하게 되면서 라스의 관객층이 넓어졌다. 그동안 극단 홍보를 SNS로 하다 보니 늘 젊은 관객만 공연장을 찾았다. 서울연극제 참여는 기성 연극인들에게 라스의 존재를 알리게 된 계기가 됐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부터는 극단 색깔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세 여신의 이야기를 발췌해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전까지는 가족이나 사랑 이야기를 주로 다뤘는데, 그 시점부터 여성 서사에 몰입했다. 당시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던 국내 상황과 조우하면서 이 작품은 더욱 화제를 모았다. 이어서 라스는 ‘헤카베’와 ‘줄리엣과 줄리엣’을 연달아 올리며 여성주의 극단으로 발돋움했다. 그렇게 라스는 10년 동안 치열히 성장해왔다.
“사실 누군가가 ‘라스의 색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잘 모르겠어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잖아요. 시대가 흘러가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늘 똑같을 순 없을 거예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우리 극단은 동시대와 함께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기쁨은 처음으로 힘에 부친다는 생각을 했다. 점점 극단 단원이 늘고 있는데 뭐가 옳고 그른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작년에 처음으로 내가 과연 라스를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꼼꼼하게 살핀다고 살폈는데도 성에 안 차는 것들 많죠. 올해는 이런 복잡한 마음을 정돈할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그저 즐거이 공연하기 위해 시작한 극단이었다.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즐거움을 감각하기가 어려워졌다. 이기쁨은 극단의 생존만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10년이 지나니 이제야 마음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정오가 지나서 인터뷰가 끝났다. 이기쁨은 그날 세 번의 리허설을 더 소화해야 했다. 이른 오전부터 그를 고단하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는 토요일에 인터뷰를 하여 되레 미안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뜨겁디뜨거운, 이기쁨을 만나 기쁜 여름이었다.
에필로그
“그런데 ‘기쁨’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준 거예요?”“원래는 친할머니가 돌림자를 써서 지었는데, 어머니가 출생신고를 하면서 ‘기쁨’으로 바꿨어요. 저를 낳아서 기쁜 마음을 담고 싶었다고 하네요!”“사람은 이름 따라간다는 말이 있잖아요.”“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 심성이 긍정적이지가 않거든요. 오히려 부정적이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편이죠. 하하.”
글_ 장혜선
사진_ 황필주(studio 79)·창작집단 LAS
+ 월간 <객석> 2019년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