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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선혜 Feb 13. 2023

스텐팬 달인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만

작은 마음먹고 '연필로 쓰기' 20일 차



스텐팬에다가 계란 프라이를 해냈을 때, 나는 실험에 성공한 과학자처럼 외쳤다.


“됐다, 됐어!”


그날 당장 코팅팬을 내다 버렸다. 이제 기름을 두르고 인덕션 온도를 높일 때마다 불안했던 코팅팬과는 안녕이다. 전업주부로서 레벨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기분이었다.



기쁨도 잠시. 불과 며칠 스탠팬에 계란 지단까지 부쳐냈을 땐 기분이 전처럼 붕붕 뜨지 않았다.  

'스텐팬의 달인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김이 샜다. 집안일이 손에 익을수록 그에 반비례하듯 나의 사회성은 퇴화하고 있는  아닐까 불안했다.








12월이 싫었다. 추운 건 둘째 치고, 11개월 동안 베짱이처럼 잘 놀아놓고선, 캐럴 소리 울려 퍼지는 12월만 되면 ‘나는 올해 뭐 했지?’하며 한숨을 쉬었다. 고작 스텐팬으로 계란 지단 부쳐낸 걸  해의 업적으로 삼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머리가 복잡하니 책도 손에 안 잡혔다. 습관처럼 내가 썼던 일기를 펼쳐 읽었다. 처음 읽는 책처럼 꼼꼼히 읽으면서 피식 웃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다가 꼬박 1시간을 읽어 내려갔다.


‘그렇게 아플 때 어떻게 일기를 썼나 몰라? 지금은 건강한데 아무것도 안 쓰고.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또다시 머릿속으로 반성문을 쓰려던 찰나, ‘일기를 투고하자’는 생각이 스쳤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30일. 그동안 출간계획서를 쓰고, 투고할만한 출판사를 알아보고, 원고를 다듬었다. 놀기만 하던 베짱이가 연말에 연주회라도 하는 것 마냥 12월 31일까지 전력을 다했다.








나 같은 작가 지망생이 책을 투고해서 출간하게 될 확률은 학교 앞 떡볶이 집에서 연예기획사 관계자에게 캐스팅될 확률만큼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도전한 건 그냥 이렇게 또 한 달 버리느니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에서였다. 한 해를 돌이켜봤을 때, 스텐팬으로 계란 지단 만들기에 성공했다는 기록보단 이게 더 나을 테니까.



무모한 도전은 성공했지만, 이 건 '작가지망생이 출간작가가 되어 행복한 제2의 인생이 펼쳐졌습니다.'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작 책을 한 권 내고 나니 심각한 번아웃이 찾아왔다. 활자로 된 모든 것을 읽고 싶지 않았고, 매일 글을 쓰기는커녕 연필 쥐고 낙서하는 것조차 싫었다. 특히 다른 작가들이 잘 나가는 걸 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땅 속에 숨어있는 주제에 왜 나를 못 알아보냐고 화를 내는 두더지 꼴이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만화책을 보는 거였다. 그때 제일 만만하게 읽었던 게 마스다 미리의 책이었다. 한국에 출판된 다 읽은 듯하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어깨에 힘이 풀렸다. 대충 그린 것 같은 주인공들의 무심한 대사를 읽는 게 좋았다. 크게 웃기지도, 엄청 눈물 나지도 않는 데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기운이 났다. 파이팅이 넘치는 종류의 기운이 아니라, 내 몸이 온기로 채워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분명히 정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러니까 전혀 큰맘 먹고 그린 것 같지 않은 만화를 보고 왜 기운이 났던 걸까?



마스다 미리의 그림과 문체에는 여백이 있다.


마스다 미리가 이 글을 읽을 리 없겠지만, 만약에 한국의 어느 무명작가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알면 어이없어할 것이다.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공들여 만든 책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화낼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그린 만화를 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것 봐. 큰 마음먹지 말고, 편하게 해. 작은 마음으로 시작해도 돼. ”








두 번째 책에 대한 엄두도 내지 못했던 건, 더 잘하고 싶어서였다. 첫 번째보다 나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번에는 좀 인지도를 쌓을 수 있을까? 대중적인 기획이어야겠지? 이번에도 별로 안 팔리면 어쩌지? 이런 물음표들이 마음을 뒤덮어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라났다. 그럴수록 자꾸 글에서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결국 나를 다시 쓰게 한 건 별 뜻 없이 시작한 일들이다. 매일 아침 눈 뜨면 10분 정도 연필로 글을 쓴다. 작문을 한다기보다 마음에 쌓아놓았던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작업이다. 그렇게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글감 중에 쓸만한 것을 골라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글로 써본다.



축구 선수들이 본경기에 들어가기 전 달리기를 하듯, 10분 동안 연필로 글을 쓰는 작업은 나에게 몸풀기 운동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제일 중요한 건 다시 쓰고 싶어 졌다는 것이다. 써야만 한다가 아니라 쓰고 싶다는 느낌은 책을 내고 난 뒤 처음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 문구점에서 수많은 점이 찍힌 놀이책을 사다 준 적이 있다. 번호대로 연결하면 모양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점만 찍혀있어서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침착하게 번호를 연결하면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나비가 되었다.



작은 점에 찍힌 번호를 따라가면 그림이 된다. 출처:네이버


나는 내일 아침에도 별일 아니라는 듯 일어나 대수롭지 않게 점 하나를 이을 것이다. 지금은 알 수 없다. 이 점을 다 이으면 도대체 무슨 모양이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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