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순간의 착각
PART 3. 이미 시작된 프로젝트를 붙잡는 시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계약도 체결되었고, 킥오프 미팅도 끝났으며, 일정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이제 남은 일은 정해진 계획을 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시점에서 기획자는 자주 이런 기분이 든다.
“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지?”
이미 제안요청서를 검토했고, 제안서를 제출했고, 계약까지 끝났다.
그런데 다시 요구사항을 확인하고, 다시 범위를 이야기하고, 다시 질문을 받기 시작한다.
계약 전에도 분명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계약이 완료되는 순간 오히려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해야 하는 느낌이 든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도, 동시에 다시 출발선에 선 것 같은 순간이다.
이 감각은 착각이 아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이 지점에서 한 번 더 ‘다시 시작’한다.
계약 전까지는 프로젝트가 가능성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무엇이 가능한지, 어떤 방향이 맞는지, 이 일정이 현실적인지 같은 판단이 열려 있고, 말과 문서가 섞인 상태로 흘러간다.
반면 계약이 체결되면 프로젝트는 기준을 세우는 단계로 넘어간다.
무엇이 포함이고 무엇이 제외인지, 어디까지가 범위인지, 그 기준을 어떻게 삼을지가 중요해진다. 그래서 프로젝트는 계약과 동시에 실행 단계로 넘어가지만, 실제로는 기준을 다시 한 번 정리해야 하는 단계로 한 번 더 돌아온다.
이 시점에서 자주 나오는 말들이 있다.
“이건 확정된 요구사항 맞죠?”
“이 기준으로 설계 들어가면 되는 거죠?”
“그때 이야기한 내용은 어디까지 반영된 건가요?”
이 질문들은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니다. 이미 계약 전부터 여러 차례 오갔던 이야기들이다. 다만 그때는 조율 중인 말이었고,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계약 이후 이 말들이 다시 등장하는 이유는 하나다. 이제는 더 이상 말로만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모든 판단은 결국 기준이 되는 결론으로 정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획자는 이 시점에서 요구사항을 다시 확인하고, 문서들을 다시 열고, 이미 지나온 대화를 다시 꺼내 정리하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는데도 다시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생각은 프로젝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단계다. 문제는 이 단계를 어떻게 지나가느냐다.
이 시점을 건너뛰면 요구사항은 각자 다르게 이해되고, 그에 대한 결론도 각자 다르게 기억된다.
그러다 보면 “그때 그렇게 결정되지 않았나요?”라는 말이 점점 잦아지게 된다.
반대로 이 시점에서 프로젝트를 다시 정리하면 이후의 논의와 판단을 하나의 기준 안에서 결정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자마자 왜 다시 요구사항 정리를 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일이 왜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