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계약 전에 이미 시작된 일들
계약이 체결되면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실무자의 입장에서 보면 업무는 그보다 훨씬 앞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모든 상황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도 계약 전부터 일정이 언급되고 자료가 오가며 사실상 일이 시작된 상태로 흘러가곤 했다.
계약이 체결되는 순간, 분위기는 분명히 달라진다. 이 시점부터 기획자는 새로운 종류의 질문을 받기 시작한다.
“이건 어디까지 포함인가요?”
“이건 확정된 요구사항 맞죠?”
“이 기준으로 개발 설계 들어가면 되는 거죠?”
이 질문들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계약 전부터 이미 여러 차례 오갔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확정 여부’를 묻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계약 전에는 변경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면, 계약 이후의 질문에는 이제는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기대가 함께 따라온다. 물론 실제 프로젝트에서는 오픈 직전까지 요구사항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점부터는, 말 한마디의 무게와 책임이 달라진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많은 판단은 말로만 존재한다. 회의에서 정리된 방향, 메일로 주고받은 설명, 미팅 말미에 덧붙여진 코멘트들. 이 시점의 말들은 대부분 ‘조율 중인 의견’이거나 ‘확정 전의 전제’에 가깝다. 그러다가 계약 체결이 유력해지면, 기획자는 이 전제들을 미리 정리하기 시작한다. 요구사항정의서 역시 이 단계에서 초안 형태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계약이 체결되는 순간, 이 말들과 문서의 상태는 분명히 달라진다. 더 이상 조율을 위한 참고가 아니라, 하나의 기준으로 일관되게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때부터 요구사항정의서는 ‘정리 중인 문서’가 아니라,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판단하는 기준 문서로 역할을 바꾼다.
요구사항정의서는 새로운 요구를 만들어내는 문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이미 나온 이야기를 정리해두는 문서도 아니다. 요구사항정의서에 한 줄을 적는 순간, 그 문장은 하나의 기준이 되고 이후의 판단을 제한한다. 그래서 이 문서를 쓰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실무에서는 요구사항이 접수된 날짜, 요구사항을 제시한 담당자, 수락 여부, 수락하지 않았을 경우의 사유까지 함께 남겨두는 경우도 많다. 요구사항 반영에 전제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 역시 문서 안에 분명히 적어둔다. 나중에 기준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계약 전의 말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회의에서 오갔던 설명, 가능성으로 언급했던 이야기들, 조율 중이라는 전제가 깔린 말들까지도 요구사항정의서라는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 말들은
“그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라는 질문을 떠받치는 근거가 된다.
요구사항정의서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쓰는 문서가 아니다.
계약 전의 말들이 더 이상 말로만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문서에 가깝다.
이 문서를 쓰는 순간, 기획자는 다시 한 번 프로젝트 범위를 점검하게 된다. 무엇을 정리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지금 기준으로 고정해도 되는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요구사항정의서와 함께 IA를 그리고, 사용자 흐름을 정리하고,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정의하는 동시에, 어디까지를 ‘우리가 하기로 한 일’로 볼 것인지를 문서로 고정하는 과정이다. 이 문서들은 이후 디자인과 개발의 뼈대가 된다.
이 과정에서 기획자는 자주 멈칫하게 된다.
“이건 그때 확정이라고 말했었나?”
“이건 가능성 정도로 이야기했던 것 아닌가?”
“이걸 여기까지 적어도 되는 걸까?”
이 멈칫거림은 망설임이 아니라 책임에 가깝다. 지금 적는 한 줄이, 이후 프로젝트 전체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하나다. 요구사항정의서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쓰는 문서가 아니라, 말로 흘러가던 판단들을 기준으로 묶어두기 위해 쓰는 문서다. 그래서 기획자는 이 문서를 쓰기 전에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내용을 기준으로 고정해도 되는가. 그 질문에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요구사항정의서는 아직 쓰일 준비가 되지 않은 문서일지도 모른다.
다음 PART에서는, 계약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 안에서
기획자가 왜 다시 처음부터 설명하고 조율해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되는지,
그리고 ‘이미 시작된 일’을 어떻게 정리하고 이어가게 되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