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일기
1. 불확실한 인생, 기도하는 인간
인생은 불확실하다.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인생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정황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인간은 이를 통제할 힘이 없다.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불확실한 인생을 통제할 힘이 없고 인생을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엔 두렵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도하는 대상은 거대하고 힘이 있으므로 이 불확실성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과연 기도를 하거나 신앙을 유지할 것인가?
2. 잘되면 하나님 덕, 못되면 내 탓
한 때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 생각했다. 신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신에 대한 체험을 투영한다. 대부분 원하는 일이 일어나면 신이 해주신 것이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나의 죄 때문에 신께 벌을 받는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욥을 시험하듯 나를 시험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식 구조에 갇혀 끝도 없이 과거의 일들과 죄가 되었을 자신의 행동을 되새기며 지옥같은 후회와 자책감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그러한 구조 속에 한 가닥 드는 생각을 억지로 삼키곤 했다. 그러한 신은 과연 정당한가? 욥에게 가해지는 고난이나 아브라함에게 행해지는 시험은 일종의 학대나 다분히 신경질적인 착취가 아닐까? 만약 내가 장기판의 말처럼 신의 일종의 장난감 노릇을 하게 된다면 과연 참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냥 미지수로 남긴 채 의문은 무시되었다. 내 체험과 의식 안에서 신은 전지전능했고 나는 그 신께 계속 의지해야했으므로. 신은 언제나 정당한 존재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3. 의심
하지만 체험의 종교는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련의 체험들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일련의 체험들로 얼마든지 부정될 수 있다. 이는 간접 체험으로도 가능하다. 신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으며 인간보다도 무력한, 이 세상에서 돌멩이 하나 들어올릴 힘조차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체험할 때 변화는 일어나는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무신론자들이 득세했던 것처럼. 개인적 혹은 사회적 환난에 처했을 때 신의 극도의 무기력한 혹은 무관심한 얼굴을 보면 지금까지의 신앙이 그저 개인적인 환상이나 집단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의심에 빠지는 것이다.
지금은 기독교는 암시의 종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이런 뜻일 것이다라고 스스로 암시를 걸면 그게 본인에겐 진리가 된다. 하물며 아무도 없는 방에서 여러 번 어떤 존재의 이름을 부르면 마치 그가 자신의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이제는 궁금하다. 세상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인간은 여전히 나약한데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은 신에게 여전히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기복신앙이 아닌 진정한 신앙이라는 자부심? 자기 수양이나 만족? 혹은 오랜 습관이나 그래도 나보다는 낫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바라지도 어떤 변화도 일으킬 생각이 없으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고 조용히 기도를 이어가는 이라면 정말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신조차도 존경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