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난해한 기운과 학교 다닐 때 한 번 잡았다가 재미없어서 포기했던 기억에 계속 미뤄두고 있던 책이었다. 하지만 워낙 유명한 책이라 의무감에 주문했고 골절 수술로 집에 갇혀있으면서 다 읽게 되었다. 의외로 잘 읽혔고 스토리도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소설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으로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그 때는 니체를 몰라서 책이 재미없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영겁회귀(永劫回歸)라고도 한다. 니체의 공상적인 관념. 그에 의하면, 생(生)은 원의 형상을 띠면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고, 피안의 생활에 이르는 것도, 환생(還生)하여 다음 세상에서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는 것도 모두 부정하고, 항상 동일한 것이 되풀이된다는 사상이다. 여기에서 니체는 현실의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생활하는 데에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원회귀의 관념은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 학파 등에서도 보이지만, 니체는 이것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발전의 사상에 대립시켜서 부활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 지식 백과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즉 우리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삶의 매 순간을 충실하게, 행복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꿔서 말하면 우리 삶이 영원 회귀의 반대인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하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우리 삶을 '밑그림 같은 것' 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밑그림' 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데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 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산다는 게 참 무섭게 느껴진다. 인생에 리허설 따위는 없다. 연습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매 순간이 실전이다. 우리는 우리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모른 채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온 힘을 다해서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1. 가벼움과 무거움, 약함과 강함
이 작품의 남자 주인공 토마시는 여자들의 악몽같은 남자이다.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졌지만 취미는 여자를 사냥하는 것이다. 25년 간 200명의 여자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며 '그리 많은 건 아니잖아' 라고 하는 남자. 아들까지 낳은 부인과 이혼 후 자유로운 독신 라이프를 즐긴다. 그는 많은 여자들과의 '에로틱한 우정' 을 추구한다. 그의 원칙은 여자들과 성관계는 가지되 동반 수면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언제나 잠들기 전에 여자를 집 밖으로 내쫓는다. 그런데 이런 원칙을 깨뜨린 첫 여자가 나타난다. 바로 여자 주인공 테레자이다. 술집 여종원이었던 그녀를 우연히 만나고 헤어졌는데(남자가 연락처를 준 상태로) 여자가 정말 큰 트렁크를 들고 남자의 집을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감기 기운이 있는 채로 와서 일주일을 앓아누워버렸다. 토마시는 아픈 그녀 옆에서 그녀가 마치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넣어진 아기'처럼 자기에게 보내졌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녀가 죽으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녀 옆에 나란히 누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토마시는 생애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에 빠진 것이다.(이후에도 지속되는 토마시의 여자 사냥을 생각하면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토마시의 기준에서 사랑은 맞는 것 같다.) 결국 그들은 결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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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자는 지방의 조그만 마을에서 어머니에 의해 학교를 그만두고 열 다섯 살부터 웨이트리스로 일한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항상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도서관에서 엄청나게 책을 많이 빌려서 본다. 그녀가 토마시를 만날 때도 그녀는 '안나 카레리나' 라는 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책을 읽고 있어서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여섯 번의 우연이 겹쳐서 그녀는 토마시를 만나게 되고 결국 서로 사랑하게 된다. 테레자는 토마시 덕분에 프라하에서 주간지 출판사의 사진부 직원이라는 어엿한 일자리를 갖게 된다. 일자리를 구해준 사비나라는 여자도 토마시의 애인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토마시의 외도로 두 사람은 갈등한다. 테레자는 나체의 여성들이 토마시를 둘러싸고 있고 그 중 자신이 있고 토마시가 그 여자들을 총으로 쏘아 하나씩 쓰러뜨리다가 결국 테레자 자신을 쏘는 악몽에 시달린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테마로 작용하는 가벼움과 무거움은 두 사람에게 반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사랑에 있어서 토마시는 가벼움을 의미하고 테레자는 무거움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토마시는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분리된 가벼움을, 테레자는 온전하고 독점적인 '그래야만 한다' 의 사랑, 즉 무거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남성이며 좋은 직업을 가진 토마시는 강함을 여성이며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 출신인 테레자는 '약함' 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래서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말한다.
<"당신이 늙기를 바라. 지금보다 열 살 더. 스무 살 더!"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나약하길 바라. 당신도 나처럼 나약하길 바라." 였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보면 테레자는 불쌍하고 토마시는 악당처럼 보인다. 내가 여성이라서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토마시 같은 남자는 사실 모든 여성들의 악몽인 것이다. 하지만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의외의 전개에 깜짝 놀라게 된다. 약자가 강자에게 고통받는 전개가 아닌 약자가 강자를 압도하고 강자가 그 강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어찌 보면 강자가 약자에 의해 전락하는 전개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2. 파국으로 가는 플롯(plot)
지루할 것 같았던 이 책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던 지점은 바로 이 작품의 플롯(plot) 이었다. 한 바람둥이 의사의 외도 이야기처럼 보이던 소설은 뒤로 갈수록 생각지도 못한 비극으로 치닫는다. 소련의 침공과 점령(1968년) 을 피해 두 사람은 스위스 취리히로 건너간다.
토마시는 취리히의 의사 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불안한 조국을 피해 안전한 나라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도 토마시의 외도는 계속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테레자는 편지를 남기고 프라하로 되돌아온다. 의외로 토마시는 큰 심리적 타격을 입는다. 의외로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나보다. 그래서 그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녀를 따라 혼란과 압제의 조국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결국 이는 토마시의 몰락의 시작점이 된다. 토마시는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가 일하던 병원에서 내쫓기게 되고 외곽의 허름한 병원, 유리 창문 닦는 노동자, 시골의 트럭 운전사 순으로 그의 인생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후에 한편으로는 육체 노동의 홀가분함에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몰락시킨 테레자를 원망한다.
소설의 놀라운 전개는 계속된다. 둘은 같이 트럭을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함께 죽게 된다. 이 당황스러운 비극적 결말은 토마시의 애인 중 한 명인 사비나를 통해 소설 중간에 미리 제시된다. 사비나는 토마시의 죽음을 두고 '그는 돈 후안이 아니라 트리스탄으로 죽은 것' 이라고 표현한다. 토마시의 애인 중 하나였던 사비나조차 테레자에 대한 토마시의 사랑이 진심이었음을 인정한다.
토마시와 테레자에게 인생은 처음이라 그들 스스로도 삶이 이렇게 전개될 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살아보니 '테레자가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떠난 것'과 '토마시가 테레자를 따라 프라하로 돌아온 것' 이 인생 일대의 실수임을 안 것이지 당시에는 누가 알 수 있을까? 연습 따위는 없는 단 한 번의 실전인 인생의 엄정함이 다시 한 번 느껴지는 부분이다.
3. 영원 회귀와 두 사람의 사랑
두 사람의 비극적 결말을 알고 있기에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더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테레자는 유리 닦는 노동자가 된 토마시에게 프라하를 떠나 지방으로 가자고 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도시의 여자들과 외도를 이어가는 토마시가 지방에 가면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방에서 그들의 생활은 평화롭게 흘러간다. 그리고 소설은 토마시와 테레자가 호텔 바의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방으로 올라오는 것으로 끝난다. 두 사람에게 이후에 닥칠 일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슬픈 결말이다.
테레자는 춤을 추면서 토마시에게 자신이 토마시 인생에서 모든 악의 원인이고 자신이 그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고 자책하지만 토마시는 자신은 이곳에서 너무 행복하고 자유롭고 홀가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그가 힘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늙고 약해진 것' 이다. 그녀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녀는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낀다.
<우주 어디엔가 우리가 두 번째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또한 지구에서 보낸 전생과 거기에서 익힌 경험을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해 보자.
그리고 이미 두 번의 전생 체험을 가지고 세 번째로 태어나는 또 다른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가 매번 더욱 성숙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다른 행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영원회귀에 대한 토마시의 생각이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소설을 찬찬히 다시 보면서 나는 두 사람의 마지막 행복한 모습이 다른 세상에서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도 가정한다. '만약 지구에서의 인생이 반복되는 제 2 행성, 제 3 행성이 있다면?' 이라고. 평행 우주가 생각났다. 평행 우주의 다른 세상에서 토마시와 테레자의 삶은 반복될 수 있을까? 그 세상에서 둘은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 이것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똑같은 삶의 무한한 반복을 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 삶은 한 번 뿐이지만 만약 두 사람에게 다음이라는 것이 적용된다면, 그래서 이번 삶이 리허설 같은 거였다면 다음 삶에서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 같은 행복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그는 꿈 속 여자와 함께 이데아 세계에서 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그들 별장의 열린 창문 아래로 테레자가 지나간다. 그녀는 혼자이고 인도에우뚝 서서 멀리서 그에게 한없이 슬픈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그는 그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가슴 속에서 테레자의 고통을 느꼈다! 그는 다시 한 번 동정의 포로가 되어 테레자의 영혼 속으로 함몰한다.>
이데아의 세계에서 자신의 완벽한 이상형인 여자와 같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테레자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토마시의 고백이다. 만약 다른 행성에서 똑같은 인생이 되풀이된다 하더라도 두 사람은 만나고 사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에는 혐오스럽기까지 했던 이 세상 쿨한 바람둥이 남자의 입에서 '다음 세상에서도 너를 사랑할 거야'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을 바라게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소설이긴 한 것 같다.
그밖에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문체이다. 매우 철학적이고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음에도 정확하고 분명하면서도 물 흐르는 듯한 문체로 어렵지 않게 잘 읽힌다. (물론 어려워서 다시 봐도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소설 속 장면에 대한 묘사 부분은 아름답고 유려한 문체가 돋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비유를 활용하는 부분이 있는데 마음에 와닿는 적절하고 아름다운 비유가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할 것이 많고 여러 번 곱씹어야 소화가 되는 것 같은 책이라 앞으로도 여러 번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만약 안 읽어보신 분이 계시다면 한 번 도전해보시길 추천하고 책을 빌리는 것보다 구입하시는 것을 추천한다. 책을 많이 사는 편이긴 한데 특별히 이 책은 소장 가치가 매우 큰 책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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