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고유성과 이별의 절망(기형도 '그 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겨울의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술집에 있다. 술잔이 늘어나고 일행들은 점점 취해 간다. 나는 그 술집에서 헤어졌던 그녀가 생각난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 너무 편하고 좋다는 생각으로 나의 입은 마음대로 움직여 그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나의 입이 너무 원망스럽다. 못생긴 입술을 가졌다는 것은 그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실수를 했다는 것으로 읽힌다. 결국 그토록 좁은 곳인 술집에서 그녀와 이별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고 술이 들어가자 그녀가 생각나고 나는 흐느낀다. 벗어둔 외투 곁에서 흐느껴 운다. 내 눈물의 의미를 눈치챈 친구들이 말한다.
"세상에 여자 많아. 잊어버리고 다른 여자 만나."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여자는 많지만 헤어진 그 여자와 같은 사람은 없다고.
(그녀와 내가 친구들 사이에 같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말실수를 하게 되어 그녀가 이별을 고하고 떠나고 친구들이 나에게 세상에 여자는 많다고 위로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시 해석에 정답은 없으니)
이 시는 어느 겨울 밤 한 남자가 느끼는 이별의 고통과 그로 인한 회한을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사랑이 과연 다른 사랑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이별한 친구들에게 쉽게 말한다. 다른 사람 만나라고, 세상에 여자(남자)는 많다고.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라는 노래도 있다. 그런데 과연 그 다른 사랑이 이전 사랑과 같은 사랑일까? 그렇지 않다. 사랑은 이전 사랑과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사랑의 고유성과 절대성을 깨달을 수 있다.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대체될 수 없다. 세상에 여자(남자)는 많지만 그 새로운 이성은 그 전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외모, 성격, 말투, 식성, 옷차림 등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다. 남자는 이 '대체될 수 없음' 에 절망한다. 사랑의 고유성과 절대성을 절감한다. 세상 어느 누구를 만나도 이별한 그녀와 같은 사랑을 다시는 할 수 없음은 사람 많은 술집에서 성인 남성이 펑펑 울게 만든다. 그렇다. 이별은 무서운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사랑한 세계는 파괴되었고 다시는 그 무너진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시는 마치 취중에 쓴 것처럼 취중의 혼란과 취기가 느껴진다. 시 자체의 서술 방식이 술에 취해 했던 말 또 하고, 비논리적인 말들을 불쑥불쑥 내뱉는 그런 느낌이다.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의미도 명확하지 않아 모호하다. 그것이 문학 언어의 특징인 애매성을 더해주어 작품의 매력도를 높이는 것 같다.
기형도(1960~1989) -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했으며 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했다.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 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후 독창적이면서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했으나 89년 3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