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카멜리아 레이디>는 안무가 존 노이마이어가 프랑스 소설 <춘희>를 각색한 작품으로 올해 가장 재밌게 본 공연이다. 원작인 <춘희>는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로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뒤마는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하여 연극으로 올렸는데 큰 인기를 끌었고, 당시 파리에 방문한 주세페 베르디가 이 연극을 보고 만든 작품이 그 유명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다.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주인공 마르그리트는 파리 사교계의 코르티잔으로 화려한 삶을 살지만 폐병으로 점점 쇠약해지고 정신적으로 외로운 삶을 산다. 한 사교파티에서 그녀는 젊은 귀족 아르망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마르그리트의 병과 아르망 가족의 반대, 사교계의 소문과 질투, 신분 차이로 인해 둘의 사랑은 비극을 맞는다. 마르그리트는 아르망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아무 설명도 없이 그를 떠난 후 마치 다시 사교계로 돌아간 것처럼 행동한다. 상처받은 아르망은 분노하며 마르그리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모욕하기까지 한다. 마르그리트는 외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아르망은 뒤늦게 마르그리트의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 후 후회한다.
이 작품은 드라마 발레로 내가 주로 즐겨보던 고전발레와는 상당히 달랐다. 드라마 발레는 모던발레의 한 종류인데 춤이나 형식을 중시하는 고전 발레와는 달리 서사와 인물들의 감정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는 게 특징이다. 이 작품은 드라마 발레 중에서도 극의 구성에 있어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보통 고전 발레는 하나의 서사가 시간 순으로 흘러가는데, 노이마이어는 이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깨고 서사의 중첩을 활용하여 인물의 감정표현을 극대화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노이마이어는 카멜리아 레이디에서 한 편의 영화 같은 발레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카멜리아 레이디는 현재와 과거를 왔다 갔다 하는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한다. <카멜리아 레이디>는 죽은 마르그리트 집에서 열리는 경매 장면으로 시작되어 아르망이 마르그리트의 유품을 만지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노이마이어는 현재와 과거의 중첩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를 중첩시켜 인물들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한다. 아르망의 회상을 따라 진행되던 공연은 중간에 아르망 아버지 시점으로 바뀌고, 마지막에는 마르그리트의 시점에서 극이 진행된다. 이러한 다층적인 서사의 중첩은 서사의 줄거리 자체보다는 특정 시점에 각각의 인물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재미는 음악에 있다. 고전 발레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진행되는데,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주로 쇼팽의 피아노 음악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작품 구상의 초기 단계에서 노이마이어는 오페라 음악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이 작품이 오페라의 대체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쇼팽의 음악을 제안받았는데,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쇼팽의 음악을 작품의 음악으로 선택하였다. 노이마이어는 쇼팽의 삶이 마르그리트의 삶과 닮아 있어서 <카멜리아 레이디>와 쇼팽의 음악 간의 강렬한 유대가 있다고 생각했다. 쇼팽은 파리 사교계의 주목을 받았고 화려한 음악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동시에 병으로 고통받는 어두운 삶을 살았는데, 이런 그의 삶은 마르그리트의 삶과 닮아 있다. 그리고 너무 화려하고 극적인 오케스트라 음악보다는 쇼팽의 음악이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보여주기에 더 좋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피아노 음악에 진행되는 발레 공연을 본 적이 없어 걱정했는데 의외로 너무 잘 어울렸다.
처음 보는 공연이라 예습을 열심히 하고 갔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볼쇼이 발레단의 <카멜리아 레이디>로 예습을 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공연을 보러 가기 전까지 3번이나 돌려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무용수 자하로바가 주연을 선 공연이다. 남자주인공은 에드윈 리바조프였다. 두 무용수의 테크닉이나 춤선 모두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그냥 둘의 얼굴의 극의 개연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연들이 캐릭터에 찰떡이었다.
마르그리트라는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마리 뒤플레시스는 뛰어난 미인이었다고 한다. 마리를 묘사한 기록에 따르면 "마리는 날씬하면서도 창백하였고, 탐스럽고 화려한 머리카락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여린 얼굴과 푸른 핏줄이 비칠 정도로 투명한 피부는 폐결핵으로 인한 쇠약한 건강 상태를 암시했습니다. 마리 자신도 일찍 세상을 마감해야 하는 슬픈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갑작스럽게 기뻐하다가 곧이어 우울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 그렇지만 마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우아했습니다". 그냥 자하로바 그 자체 아닌가. 무용수는 배우처럼 말로 감정을 전달할 수 없고, 몸과 표정으로 모든 걸 말해야 하기 때문에 때때로 발레에서 무용수의 외모, 분위기, 신체조건이 서사 자체의 설득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자하로바의 가늘고 긴 팔다리가 병약한 마르그리트에 찰떡이었다(물론 자하로바가 찰떡이 아닌 캐릭터는 없다고 생각한다..).
볼쇼이 발레단의 <카멜리아 레이디>는 카메라 앵글을 적극 활용하여 발레 공연을 진짜 한 편의 영화처럼 기록했다. 무대 전체를 보여주는 앵글과 클로즈업 앵글을 활용해서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카메라 워크가 클로즈업 중심이라 무용 전체의 구도나 파드되를 보기 어려워 별로라는 평도 있지만, 난 오히려 이런 앵글활용 덕에 정말 한 편의 영화처럼 인물의 감정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이 영상을 보고 가서 그런지 실제 공연에서 <카멜리아 레이디>라는 작품이 가진 절절하고 애절한 감정이 좀 덜 느껴졌다. 이 공연에서 자하로바의 연기가 넘사벽이다. 자하로바 덕질을 하면서 타고난 신체에 테크닉이 뛰어난 사람인줄만 알았는데 연기력도 뛰어나다..ㅎㅎ
국립발레단이 처음으로 선 보이는 <카멜리아 레이디>여서 티켓팅이 치열했다. 내가 예약한 공연은 5월 9일 조연재-변성완 캐스팅 공연이었는데, 8일 오전에 갑자기 당일 취소표가 떠서 한나래-곽동현 캐스팅 공연도 추가로 보러 갔다. 조연재 무용수를 좋아하지만 마르그리트와는 좀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캐스팅의 공연이 궁금했다.
5월 8일 한나래, 곽동현
사실 첫 공연은 극에 몰입하지 못한 것 같다.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과 자꾸 비교가 돼서 완전히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이날 공연을 보면서 느낀 건 페어의 합이 얼마나 중요한가이다. 개별 무용수의 기량과는 별개로, 신체 조건, 춤의 결, 얼굴과 분위기까지 포함한 ‘합’이 맞는 페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가장 중요한 주연의 파드되에서 아쉬움이 컸다. 특히 이 작품은 각각의 막마다 등장하는 주연들의 파드되가 중요하다. 1막에서는 마르그리트가 아르망의 고백을 받고 둘이 사랑에 빠지는 파드되, 2막에서는 마르그리트가 후원자와 결별한 후 아르망과 사랑을 확인하는 파드되, 3막에서는 마르그리트가 헤어졌던 아르망을 찾아가 격렬하게 추는 파드되로 각각 퍼플, 화이트, 블랙 파드되로 불린다. 둘의 사랑이 변하는 형태를 보여주는 파드되로 절절한 사랑이 느껴져야 하는데, 파드되에서 발레리노의 힘듦이 계속 보여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파드되가 길기도 하고 리프트 동작이 계속되는데, 발레리노의 덜덜 떨리는 팔을 보면서 사고가 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마르그리트를 연기한 한나래 무용수는 외형적으로도 병약미 넘치는 인물에 잘 어울렸고, 특히 감정 표현에서 강점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인상 깊었던 캐릭터로, 이재우 무용수가 가스통을 연기했는데 테토남 연기를 아주 감칠맛 나게 해서 인상 깊었다.
5월 9일 조연재, 변성완
두 번째 날은 처음 보는 공연에 대한 긴장감? 낯섦? 이 옅어져서 극에 잘 집중했다. 주연들의 춤이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어서 더 집중이 잘 된 것도 있다. 특히 전날 주연 파드되에서 느껴지던 불안감이 없어져서 한층 더 작품에 몰입하기 쉬웠다. 조연재 무용수는 언제나처럼 탄탄한 테크닉과 아름다운 춤선을 보여줬지만, 마르그리트라는 인물과의 궁합에서는 좀 아쉬움이 남았다. 조연재 무용수는 키트리 같은 깨발랄한 역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마르그리트는 폐병 걸려 죽어가면서도 절절한 운명을 거스르는 가슴 아픈 사랑을 해야 하는데, 1막과 2막에서 보여준 연기는 첫사랑에 빠져 마냥 행복한 소녀 같아 아쉬웠다.
한 참이 지나 공연후기를 쓰느라 공연을 본 직후 남겨둔 메모를 다시 봤는데, 아쉬웠다는 얘기만 적혀 있어 적잖이 당황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올해 가장 재밌게 본 발레공연인데 이렇게 혹평만 써 놓다니. 볼쇼이 발레단의 <카멜리아 레이디>를 여러 번 본 상태였기에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던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아쉬운 지점들이 있었던 것도 맞다. 이런 나의 아쉬움은 국립발레단에 대한 기대가 높은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잘못된 비교이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내 논문을 보고 교수님처럼 못 썼다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비교인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공연에서 느껴진 아쉬움이 단순히 무용수들의 기량 차이뿐만은 아닌 것 같다. 볼쇼이 발레단의 영상은 카메라 워크를 통해 극의 흐름과 감정을 극대화해서 작품이 더 드라마틱하게 보인 것 같다. 영상에서는 클로즈업과 카메라 앵글이 인물의 감정을 대신 설명해 주지만, 실황 공연에서는 그 역할을 오롯이 무용수의 몸과 호흡이 맡는다. 그래서 영상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감정선이 무대에서는 여러 요소들이 섞여서 좀 덜 극적으로 느껴진 것 같다. 이런 공연을 국립발레단이 올렸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고, 그 덕에 자주 접하는 고전발레가 아닌 새로운 작품을 감상했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었다. 국립발레단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해 본다.
*사진 출처: 국립발레단 홈페이지(https://www.korean-national-ballet.kr/ko/performance/view?id=1438&perf_type=PERF_TYPE_REGULAR&perf_year=2025)
**사진 출처: 볼쇼이 발레단 카멜리아 레이디(https://youtu.be/u29kfBhTCY0?si=0ZUa-HnP18eeucV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