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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그린 Aug 20. 2022

늙으면 우리 같이 살아요

인간관계(6)


중년의 아경에게 P가 말했다.


“늙으면 우리 같이 살아요.”


아경은 같은 독신 여성이지만, 같이 살고 싶을 정도로 P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 전에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봐드려야 하지 않나요?”


아경은 그렇게 돌려서 P의 제안이 '싫다'는 것을 표현했다.


P는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를 나와 따로 살고 있었다.


“맨날 돈 없다, 아프다고 하셔서 같이 살기 싫어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P가 아경에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돈 없다>, <아프다>였다.


번아웃으로 퇴사한 후 노후가 걱정되고,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추적검사를 받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갱년기 증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하는 아경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잠시 그런 걱정을 잊고 즐겁자고 하는 일인데, P의 <돈 없다>, <아프다>는 소리를 이제 그만 듣고 싶었던 차였다.


<너의 부모님은 너를 키우기라도 했지. 내가 생판 남인 너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우울해져야 하니, 그것도 모자라서 같이 살면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너~어무 끔찍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욕심 많은 우리 언니가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아경은 웃으면서 농담하듯이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경의 자산은 자기 자식이 물려받아야 한다고 굳건하게 믿고 있는 언니가 돈 없고 아프다며 아경과 같이 살자는 P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언니는 혹여라도 아경이가 조카들이 아닌 생판 남인 돈 없고 아프다는 P에게 한푼이라도 쓰는 일이 벌어질까 봐 당장 달려 오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경에게 들어서 아경의 언니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던 P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사실 P의 제안을 들었을 때 아경은 M을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와 노년에 함께 산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보다 <돈 많은>, <건강한> 사람을 원할 것이다.

 

인생은 여행과 같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낯선 곳을 향해 나아가면서 <돈 없다>, <아프다>라는 이와 동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어려움이 닥치면 서로가 힘을 합쳐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을 곁에 가까이 두고 싶어 한다.


고등학교 때 만나 30년이 훌쩍 넘게 인연을 이어가는 M은 아경에게 그런 친구였다.


우직하고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친구!


예전에 아경도 종종 M에게 “우리 늙으면 같이 살자”라고 했다.


그런데 아경은 P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M보다 <돈 없고>, <병약한> 아경이라, M에게 아경 자신이 P와 같은 부담스러워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아경은 백수에 돈도 못 벌고, 오십이 넘으면서 여기저기 아프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다.


사실 같은 공간에 다른 사람과 사는 것은 아경에게 맞지 않았다.


오랜 독신생활이 이제 익숙한 탓이었다.


대신 저녁밥 먹고 집에서 나와 함께 산책하다가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정도가 좋았다.


“같이 살자”라는 말 대신 “같은 동네에 모여 살다가 괜찮은 실버타운에 들어가자”라고 말을 바꿨다.


M이 그것도 너무 부담스러워할까 봐 비혼인 세 친구들도 꼬드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경보다 <돈 많고>, <건강한> 친구들이었다.

 

아경과 M, 세 친구들, 그렇게 다섯 명은 종종 여행을 떠나는 멤버였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낯선 여행지에서도 아경은 한결 편안했다.


<우리가 뭉치면 헤쳐나가지 못할 일이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어디서든 그들은 서로를 챙기고 각자의 역할을 해냈고, 아경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불안>과 <두려움>이 희미해지고 새로운 풍경 속에 <도전>과 <호기심>이 커가면서 여행은 더할 나위없이 즐거워졌다.



지금도 그들은 다 같이 여행을 떠났고, 돌아와서는 함께 했던 그때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신기하게도 똑같은 이야기인데도 할 때마다 새롭고 재미있었다.


아경은 그들에게만은 자신의 현재 자산에 대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조금은 공개했다.


그리고 늘 “먹고 살만큼은 있어” 또는 “함께 여행 갈 돈은 항상 준비해두고 있어, 나 빼놓고 갈 생각 하지 마!”라고 말했다.


사실 아경은 소소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먼 훗날 돈 다 떨어지고,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몸이 안 좋아지면 봄빛이 따사로운 날을 골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아경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싫은 만큼 자신이 타인에게 민폐가 되는 것도 싫었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다.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부탁하지도 시키지도 말자!>


이것은 아경이 세운 삶의 중요한 원칙이었고 종종 무너지기도 했지만 지키려고 애썼다.


오래도록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돈>과 <건강>이 필수조건이었다.  


아경은 자신과 M 그리고 세 친구들의 모임을 '오성(五星) 클럽'이라고 불렀다.


촌스러운 작명이었기에 친구들은 호응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아경은 상관없었다.


바쁜 일상에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비추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아경의 바램이 담겼으니까.  


그리고 열심히 사는 친구들은 자꾸 무기력해지려는 아경에게 자극을 주는 <별>같은 존재들이기도 했다.


물론 아경은 친구들이 너무 자만해지고 잘난 척 할까 봐 그런 생각을 밝힌 적은 없었다.  


암튼 오성 클럽도 나이가 들면서 노화현상으로 발병하는 질환은 어쩔 수 없었다.


M을 만난 지는 30년이 훌쩍 넘었고, 세친구들도 14년차였다.


다들 어딘가 아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비관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살짝 희화화해서 분위기를 다운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아경도 친구들도 아파도 아픈 내색을 그리 자주, 오래 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번지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았다.


그 점이 P와 다른 점이었다.


오성 클럽에서 인생이란 그렇게 흘려버리기에는 너무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아경과 친구들 사이에는 <유머>가 있었다.


번아웃에 회사를 뛰쳐나온 아경과 달리 아직도 너무 열심히 일하는 친구들에게 아경이 종종 하는 말이 있었다.


<살살 해, 살살. 건강 관리하면서, 내가 성격이 이상해서 친구가 별로 없다는 것 알잖아. 나랑 오래 놀아줘야지. 안 그러면 나 정말 화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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