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브그린 Aug 05. 2022

여자는 죄인이다

인간관계(4)

금낭화는 종종 며느리밥풀꽃과 닮아 혼동되기도 한다. 다행이다. 이렇게 예쁜 꽃에 그런 슬픈 사연 따위는 없으니 말이다.


아경도 젊은 시절 연애를 했다.


K는 깔끔한 외모에 매너가 좋은, 그리고 술을 마시지 않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취향도 비슷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그는 <독신주의자>였다. 


아경에게 K는 <혹시 나를 만나는 것이 결혼이 목적이라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헤어지자>라고도 말했다.


아경도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기에 그를 계속 만났다. 


일에 대한 자부심과 성취도가 높은 사람인지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만나면 즐거웠기에 아경은 만족했다. 


하지만 점점 그들의 관계도 변했다. 


바로 K로 인해서였다. 


그는 누나 넷에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다. 


그것도 아경은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주선자가 분명 누나 하나 있는 1남 1녀라고 했는데, K가 친한 막내 누나 이야기만 해서 잘못 알고 있었다.


K는 주선자가 물어보지 않아서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6남매 맏며느리로 힘들게 살아왔던 것을 곁에서 지켜본 아경은 K의 가족관계를 처음부터 알았다면 분명 소개팅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알고 나서도 아경은 비록 K의 변명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지만 <연애>에는 크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아 그냥 넘어갔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K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계획과 포부가 있어 결혼을 원하지 않았지만, 연로한 부모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려고 아경을 <방패>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쫓아오는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 아경과 맞닥뜨리게 만들었다. 


아무 예고도 없이 그 상황에 처한 아경은 당혹스러웠다.  


K의 어머니는 아경의 할머니뻘 되는 연로한 어르신이었다. 


그 시대의 어르신들이 그러하듯이 K의 어머니도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남편과 하나뿐인 아들 K에게 희생과 헌신을 다한 분이었다. 


K의 어머니는 아경에게 말했다.


“여자는 죄인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경은 할머니가 떠올랐다. 


언니에 이어 아경이 태어났을 때,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로 할머니는 어머니를 심하게 구박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아경이가 배고파서 울자,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먹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할머니에게는 아경은 태어나자마자 굶어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었다. 


아경보다 9살 많은 늦둥이 막내아들이 있는 할머니는 그 아들의 학업과 결혼을 아경의 아버지인 장남에게 모두 떠맡길 계획이었는데, 살림 밑천이라는 첫째 손녀는 그렇다 치더라도 둘째 손녀인 아경에게 들어갈 돈이 몹시 아까웠다. 


마치 자기 아들의 몫을 아경이 빼앗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할머니의 장녀였던 큰 고모는 신생아인 아경을 데리고 창틀에 앉아 있다가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뜨렸다. 


훗날 고모는 아경에게 그 사건을 고백했다. 


<내가 너 갓난아기였을 때 실수로 창에서 떨어뜨렸다>라고 말이다. 


아경은 <정말 실수였을까?>하는 의문을 품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경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이 늦는 것이 그 사건 때문이 아닐까 전전긍긍했었다. 


고모는 아경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고 낮은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자신도 결혼하고 자식을 둘이나 낳아보니 그 일이 너무도 마음에 걸렸던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아경은 자신을 가부장적이고 남아선호 사상이 팽배한 집안의 <생존자>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머니는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서 자식들을 키워내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자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버티다 50대 초반에 세상을 등졌다. 


아경의 귀에는 K의 어머니가 했던 <여자는 죄인이다>라는 말이 <여자인 너는 남자인 내 아들과 우리 집안을 위해 죄인처럼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로 들렸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여자라는 이유로 죄인처럼 살아오신 어르신이야 그렇게 말할 수 있어도 아경은 아직도 이런 말을 듣고 있는 자기 자신이 어머니를 배신하는 것처럼 여겨져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목숨을 갈아넣으며 키워낸 딸로서 아경은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당당하게, 반드시 행복해져야만 했다. 


그것을 그 자리에서 아경은 가슴에 사무치도록 깨달았다.  


그날 아경은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예의 바른 모습으로 어르신의 말을 끝까지 들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 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경은 자신을 <방패>로 계속 이용하려는 K와 헤어졌다.  


그 이후로 세월이 흘러 주선자를 통해 <오빠가 미안해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K는 자신의 원대로 여전히 독신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내 팔자는 내가 정하겠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