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여행을 위한 예습여행
소위 '새내기' 시절부터 늘 붙어다니던 친구 둘이 있다. 사이가 틀어져 사진을 없애야 된다면 내 싸이월드 사진첩 90%정도 삭제되는 그런 애들. 우리 셋은 성격이 너무 달라서 선배들이 보면 '너희가 어떻게 친한지를 모르겠다'고들 말하지만 뭐 끼리끼리 유유상종 결정적으로 근묵자흑이라고 성향이 비슷하다. 뭐 다- 통하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굵다 가늘다 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는거 아니겠숩니까?
학교를 다니는 4년을 정말 하루같이, 짧게는 반나절을 길게는 14박을 함께하면서 기대하는 것이 많아 실망할 때도 있었고, 오히려 예상하지 못해 고마움이 큰 적도 있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 든든할 때도 있었고, 표현하지 않는 남자같은 무심함에 투덜거릴 때도 있었다. 제일 털털할거 같아서는 범우주적으로 예민무쌍한 나를, 제일 예민하게 생겨서는 걱실걱실 모든 것을 보듬는 이 두 명의 친구들이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 놓인 우리가 되어 예전보다야 많이 데면데면해졌지만서도 놓을 수 없는 끈이 있다 해야되나. 왠지 얘네한테는 내가 친구만이 아니라 언니도 됐다 동생도 됐다하는 그런 마음이랄까.
그런 우리의 여행
10년이 넘는 동안 2천번 정도는 만났을 이 친구들과 정말 오랜만에 여행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얘들과의 여행은 언제나 급작스럽고, 즉흥적이며, 빠르다. 첫 여행은 유럽여행이었는데 비행기표는 이야기가 나온 그 다음 날 샀고, 3주 뒤에 떠났다. 두번째 여행은 부산, 세번째 여행은 순천-만(둘 다 기차표는 다음 날 샀고, 1주 뒤에 떠났다). 네번째 여행인 이번 여행은 오사카. 몇 년 전부터 시도는 했지만 삐그덕거렸는데 '호그와트 가고 싶다'는 한 마디가 나오고선 40분 뒤 쯤 발권을 끝냈다. 여행 기간은 기가막히게 내 생일±1일. 이런게 우리 셋의 케미. 이런게 우리의 내진설계쯤되는 취향과 성향.
다들 여행을 자주 나가는 여행의 준고수쯤 되는, 일본이 처음도 아닌 (심지어 나는 간사이가 친숙하다) 사람들이라 설렘이 가기 전날쯤에 폭발, 아니다, 아니네, 출발 당일에 폭발한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맥시멀리스트의 짐싸기
피지못할 때만 탄다는 피치항공의 주말 저녁 비행은 정말 여행의 맥시멀리즘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이 인간들 어떻게 이렇게 쪼그마한 기내용에 군소리없이 3박 4일 짐을 다 챙겨온다는건지 모르겠네. 이 미친 미니멀리스트들. 심적인 압박이 상당했지만 이내 곧 나는 나의 모든 공감각과 형이상학, 3차원적 시각을 동원하여 가지고가야겠다 생각한 모든 것을 구겨 넣는 쾌거를 달성했다. (욕 먹을까봐 짐꾸러미 리스트는 차마 공개할 수 없다. 맛보기로 양말 5개정도)
덤앤덤앤더머
세상에서 가장 좋은 순간인 공항리무진을 기다리는데 혼자 여행을 가거나 가족과 여행을 갈 때와는 또 다른 설렘이 느껴진다. 약간의 외로움과 두려움, 편안함과 안정감과는 다른 그냥 뭐랄까 살짝 미쳐도 될 것 같은 시쳇말로 다소 병맛이어도 될 것 같은 그런 미치광이같은 설렘.
인천공항 면세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공기가 있는데,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출근하고 와서 슬쩍 지쳐서 솔직히 눈치 조금 보고 있었는데, 얘들도 출국심사대를 통과하자마자 미처 숨길 새 없이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러면 좀 촌스러워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비행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인터넷 면세점에서만 마주했던 우리의 '아가'들을 곧 만다는 생각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하면 우린 그 때 나이에 맞지 않게, 여권에 찍힌 십수번의 출국기록과는 어울리지 않게 좀 방방 뛰었던 것 같다.
난 이런 기분들이 참 좋다. 덤앤더머에서 진화 된 덤앤덤앤더머들 같은. 혼자 두면 아주 멀쩡한 사람인데 셋으로 묶으니 돌아가면서 한두명씩 나사 풀려 헤롱거리는 이 느낌이 나는 참 좋다. 그리고 얘들은 나와 다르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헤롱거리는거 같아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뭐랄까 어릴 때는 머리가 앞서던 것이 이제는 마음이 앞 서 무엇이든 나눠 주고 싶다. 그래서 얼큰한 게 먹고 싶대서 사먹은 짬뽕밥의 새우도 흔쾌히 양보할 수 있었던거 같다. '너 먹어'
50분 늦게 이륙한 비행기 덕분에 막차타려고 10kg짜리를 들고 날기도 하고(와 비행기 내려서 입국심사하고 나오는데까지 20분 안걸림. 일본국민보다 빨리나온 듯. 스고이데스) 난바시티역에서 출구찾아 헤매기도 하고, 세상 친절하다는 일본에서 승차거부도 당해보고, 심지어 태어준다는 택시한테 진심이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숙소에 도착해서는 조증이 찾아와서 놀다가 2시쯤인가 자려는데, 온수 안 틀어서 뜨거운물 안나오는데도 말도 않고, 덜차가운물(미지근 물 아니고, 따뜻한 물 아니고)로 씻고 나와서 춥다고하다 기절하듯 첫 날이 지나갔다.
예습여행
여행에서 돌아오면 한 동안 출근길엔 무엇에 홀린듯 여행사진을 본다. 혼자 다녀온 여행이나, 둘이 다녀온 여행에서는 풍경 사진이 많은데, 역시 셋이 다녀오니 이래저래 사람 사진들이 많아 또 다르게 사진 볼 맛이 난다. 그 중에서도 오사카로 출발하기 전 기내에서 셋이 찍은 사진이 참 흐뭇하다. 무딘 두 명은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이제 또 우리가 얼마나 같이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생각하니 소소한 순간마저 소중하다. 그래도 이게 마지막 여행은 아니니까. 우리 마지막 여행은 팔-구순을 기념하는 도쿄 디즈니랜드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