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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성 Mar 03. 2023

유관순·한용운·화가 이중섭 등이 잠든 망우역사문화공원

서울시 중랑구 

근현대사 50여 명이 잠들어 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 / 이하 ⓒ김종성

국가보훈처는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애국독립지사들의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복원해 공개했다. 그 가운데 유관순 열사의 모습은 늘 가슴 한편을 아릿하게 한다. 1902년~1920년이라는 짧디짧은 생몰연도 때문이기도 하고,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시위 와중에 부모님마저 일본군의 총칼에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는데 공식사망원인이 방광파열일 정도로 일제의 잔인무도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올 3·1절은 유관순 열사가 잠들어 있는 무덤에 찾아가 참배를 드리고 싶었다. 고향인 충남 천안에 묻혀 있을까 알아봤더니 뜻밖에도 서울시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에 영면해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망우리 공동묘지라 불렀던 곳이다. 1930년대 경성(서울)의 인구가 급속히 팽창하면서 일제가 조성했다. 1973년 폐장하였고 현재 약 7,0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유관순 열사 외에도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화가 이중섭 등 근현대사 인물 50여분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서울시민이라면 꼭 가봐야 할 곳이지 싶다. 

망우역사문화공원 방문자센터 중랑망우공간

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에서 시민들을 맞이하는 중랑망우공간은 방문자 센터로 기획전시실과 카페, 전망대 등을 갖추고 있다. 망우산 자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의 경사면을 이용해 낮고 길게 뻗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2층에서는 120m 길이의 긴 테라스가 전망대 역할을 해 가까이는 망우산 자락 묘지들과 능선을 보고 멀리는 남산부터 불암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 건물 이름을 '공간'이라고 한 이유가 느껴지는 건축물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의 랜드마크 건물이 아닌, 존재감 없이 자연 속에 녹아드는 건물로 ‘서울특별시 건축상’을 받을만하다. 중랑망우공간에서 묘역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가 이어져 있어 어려움 없이 역사문화 인물들이 묘역을 둘러 볼 수 있다. 이제 망우리공원은 단순한 묘지공원이 아니라 근현대사 보고, 시민휴식공간, 역사의 산 교육장 등 역사·휴식이 공존하는 새로운 쉼터로 거듭나고 있다.

산책하기 좋은 망우리 사잇길
유관순 열사가 잠들어 있는 합장묘와 묘비

중랑망우공간 앞에서 ‘망우리 사잇길’ 산책로가 망우산 허리둘레를 따라 이어진다. 이어지는 용마산까지 산행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등 봄맞이 나온 시민들이 오간다. 서울시내, 수락산, 한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망우리 사잇길을 사부작사부작 걸었더니 겨우내 움츠려 굳었던 몸이 다 풀렸다. 길가엔 다양한 모습의 산소와 함께 익숙한 이름의 무덤도 보여 발길이 머물게 된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이태원 묘지 무연분묘 합장비'. 유관순 열사가 묻혀있는 곳으로 남녀노소 시민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무연고 묘로 묻히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순국했고 유관순 열사의 후손이 없어서였다. 이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면서 무연고 묘들을 화장하여 합동묘와 위령비가 세워졌다. 유관순 열사의 넋을 이렇게밖에 기릴 수 없게 되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에 중랑구에서는 매년 유관순 열사의 기일인 9월 28일에 추모식을 열고 있다고 한다. 

망우리 사잇길에서 보이는 망우산 자락
아내와 함께 잠들어 있는 만해 한용운 무덤

공동묘지가 들어선 망우산(忘憂山)은 근심을 잊는다는 이색적인 뜻이 담긴 곳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묻힐 동구릉을 둘러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넘으며 “이제야 근심을 잊었구나.”라는 말을 남기면서 ‘망우리(忘憂里)’ 고개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 지명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망우리 공동묘지라는 이름은 2004년 망우역사문화공원이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2015년에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이곳엔 유관순 열사 외에 만해 한용운,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 운동가들도 잠들어 있어 3·1절, 광복절마다 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한용운 선생 무덤엔 부인이 옆에 잠들어 있다. 만해는 승려로 알고 있었는데 아내가 있었다니 의외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외치며 '절은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민족은 장래를 위해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며 대처승을 주장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슬하에 딸도 두었다.

망우리 사잇길에서 만나는 애국독립지사들
그리워하던 두 아이들이 새겨진 이중섭 화가 묘비

애국독립지사들 외에도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소파 방정환, 근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다가 이승만에게 사형당한 정치인 조봉암의 묘를 만날 수 있다. 국민화가이자 가슴 아픈 사연이 많은 화가 이중섭(1916~56)의 무덤에도 발길이 머무르게 된다. 


아담한 묘비엔 그가 그리워하던 두 아이가 꼭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담은 그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 마음을 짠하게 한다. 41년 짧은 그의 생애를 톺아보면 천재화가, 국민화가 보다는 그리움의 화가란 말이 맞지 싶다. 


19세기 말 최악의 역병 천연두가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자 일본으로 건너가 천연두 예방 백신 채집법을 배워 종두법을 전파하고 우두국(천연두 백신 접종소)를 설치한 문신이자 개화사상가 지석영 선생의 무덤도 빼놓을 수 없다. 고종은 지석영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하여 태극장과 팔괘장을 수여했다. 오른편에 큰아들 무덤이 든든하게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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