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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구경] 서울도심을 가르는, 청계천 자전거여행

서울 청계천 자전거여행

by 김종성
DSC00788.JPG 청계천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길 / 이하 ⓒ김종성

청계천(淸溪川)은 서울을 한번쯤 찾는 이들의 관광지이면서, 서울 시민들을 받고 있는 도심 속 산책로다. 종로구와 동대문구·중구·성동구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약 11km의 소담한 물줄기다. 작은 하천이지만 청계천은 한강만큼이나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600년 수도 서울이 가지는 역사이기도 하고, 시민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소소한 추억이기도 하다. 청계천 양편에 도로 다이어트 방식(차도를 줄여 새로운 길을 조성)의 자전거도로가 생기면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자전거타고 다니기 좋아졌다.


청계천엔 건너갈 수 있는 도보용 다리가 22개나 된다. 이 가운데 광통교와 수표교 등 옛 돌다리가 있는가하면 버들다리처럼 정겨운 이름의 다리와 한때 콘크리트로 하천을 덮고 세웠던 고가다리의 흔적도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서울의 변화 과정을 추억하고 상상하다보면 청계천은 훌륭한 유적지구나 싶다.


조선 초 만든 광통교와 수표교

image_6356299581544786964263.jpg 청계천의 옛 돌다리 광통교

광통교와 수표교는 조선시대 태종과 세종 때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벌여 청계천을 정비하면서 만든 다리다. 태종은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면서 하천 이름을 '개천(開川)'으로 지었다.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다.


청계천이란 현재의 이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창지개명(創地改名)'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지명을 새로 지을 때 생겨난 이름이다. 이때 서울의 당시 이름인 '한성'을 없애고‘경성부(京城府)’로 고치는 등 우리의 산·강·지명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작은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광화문 청계천 상류에서 하류방향으로 가다 만나는 광통교(종로구 서린동)엔 멋진 문양을 한 네모난 돌들이 박혀있어 눈길을 끈다. 광통교 돌들엔 역사 속 이야기가 숨어있다. 돌들의 원래 자리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 무덤으로, 아들 태종 이방원이 강씨 무덤에서 가져왔다.


이성계가 왕위를 강씨 소생이자 세자인 방석에게 넘겨주려고 하자, 전처 소생인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방원은 이후 정권을 장악하고 나니 강씨가 미웠나보다. 강씨가 죽고 난 뒤에 묘지석을 파가지고 광통교를 만들었다. 한양 사람들이 이 돌들을 밟고 다니라고 한 것.

DSC00755.JPG 청계천을 지나는 자전거 여행자들

경복궁이 바라다 보이는 광통교 일대는 18세기 후반 그림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유명했던 한양 최고의 번화가였다. 도시민의 문화적 욕구가 커지면서 그림 감상과 소유에 관심이 커졌다. 왕실과 사대부로 대표되는 상류층 문화가 확산되면서 광통교 일대를 서화의 유통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수표교(종로구 관수동)란 옛 다리는 이상하게 석교가 아닌 어설픈 나무다리다. 다리 모양새만 갖췄다. 지난 1959년, 청계천을 복개하고 고가를 설치하면서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졌고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조선 세종 2년인 1420년에 세워진 수표교는 임금의 어가행렬이 지나가던 다리로 청계천의 상징이었다. 세종 23년(1441)에 다리 옆에 돌로 만든 수표(水標, 보물 838호)를 세워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 수표교로 이름 지어졌다. 천변에 자리한 청계천 박물관(성동구 마장동)에 가면 정문 앞에 서있는 수표를 볼 수 있다.


전태일 동상이 서있는 버들다리

image_6888870371544150202959.jpg 평화시장 앞에 서있는 전태일 동상
전태일.jpg 1960년대 전태일과 동료들 사진

하천을 건너가는 여러 개의 다리 가운덴 천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이름 지은 '버들다리'(종로구 종로5가)가 있다.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다리 위에 전태일(1948~1970) 동상이 서 있다. 그가 16살 어린 나이에 상경해 재봉사, 재단사로 일했던 동대문 평화시장이 바라다 보인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외치며 22살 짧은 삶을 살다 갔다.


전태일이 만들었다는 친목회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21살 때이던 1969년,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 현실에 맞서 싸우고자 재단사 친구들을 모아 친목회를 만들었다. 이때 그는 멋있고 과시적인 이름을 물리치고 하필이면 '바보회'로 명칭을 정한다.


근로기준법에 8시간만 노동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우리는 여태껏 그것을 몰랐으니 바보가 아니었느냐?'라는 깊은 각오가 전태일로 하여금 그런 역설적인 이름을 짓게 했다고 한다.


한양도성 물줄기의 역사를 품고 있는 청계천 박물관

DSC01042.jpg 옛 청계천변 동네 모습을 재현해 놓은 판잣집 체험관
DSC01055.jpg 판잣집 체험관

청계천 하류 구간을 지나다보면 만날 수 있는 청계천박물관은 한양도성 물줄기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다. 강도 아닌 작은 개천에 박물관이 있는 물줄기는 청계천이 유일하지 싶다. 과거 경강(京江)이라 불릴만하다. 천변에 자리한 이채로운 판자촌 덕택에 이 박물관을 알게 됐다. 천변가에 지난 1950~60년대 청계천에 자리하고 있었던 판잣집을 재현해 놓았다.


외관도 눈길을 끌지만 안에 들어가면 40~60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연탄가게 '청계연탄', 만화가게, 구멍가게 '광명상회' 에다 당시의 교실 등을 꾸며놓았다. 소품 하나하나가 정답다. 교실 안 나무 책·걸상, 연탄난로 위의 양은주전자, 동그란 나무 밥상에 놓인 양은냄비와 노란 양재기, 벽에 걸린 까만 교복과 교모는 직접 입어보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박물관 3층에서 일제 강점기 때인 1914년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고 북촌과 남촌의 경계가 된 사실을 알게 됐다. 1914년은 일제가 '창지개명(創地改名)'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지명을 새로 지은 해다. 이때 서울의 당시 이름인 '한성'을 없애고‘경성부(京城府)’로 고치는 등 우리의 산·강·지명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다.

DSC01133.jpg 청계천 박물관
DSC01092.jpg 1950~60년대 청계천 풍경

청계천 변 약국집 아들이었던 소설가 박태원이 소설 ‘천변풍경’에서 묘사했던 풍경도 기억에 남는다. 아낙네들의 빨래터였던 청계천이 8·15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빈민들의 ‘하꼬방’(판잣집)으로 채워진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6·25 전쟁이 끝난 폐허의 땅, 청계천변에는 피난민들이 내려와 거대한 판자촌을 이룬 풍경이 생경하고 놀라웠다.


박물관 관람을 하면서 한 권의 책을 읽는 듯 했다. 몰랐던 역사적인 내용,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이곳에 들르지 않았다면 청계천 공사 중 장통교가 사라진 것도, 수표교가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진 사실, 광통교 돌들에 담긴 사연도 몰랐을 듯하다. 박물관 관람 후 자전거를 타고 다시 청계천변을 달려가는 길, 물줄기가 새롭고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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