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일기 하나, 동료를 떠나보내야 할 때
나 냈어, 사직서.
복사기 앞에 선 언니의 손을 흘끗 바라본다. 언니는 여러 번 수정을 거친 것처럼 보이는 사직서를 들고 있다. 표정이 후련해보이기도, 서운해보이기도 한다. 언니, 수고했어요. 마음 고생 많았잖아요 그동안. 이제 정리하면서 좀 쉴 수 있겠네요. 나는 언니 어깨에 손을 얹고 몇 번 툭툭, 친다. 한 달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새삼 새롭다. 이 고달픈 회사생활을 함께 한 또 한 명의 사람이 떠난다. 기억해야 할 자리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
언니는 누구보다 감정을 잘 공유해 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힘들었겠다, 라고 위로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그랬어? 라고 맞장구쳐주는. 언니는 똑똑한 사람이기도 했다.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마주하는 회계 지식을 채워줄 수 있는 오아시스같은 존재. 동기들은 품의를 받거나 회계적인 전문지식을 확인해야 할 때 회계팀의 다른 직원들보다 언니를 찼았다. 정확하게, 친절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채워주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냥 알고 지내도 고마울진대 심지어 언니와 나는 친자매같은 사이였다. 많은 시간동안, 정글같은 이 곳에서 서로에게 기댈 곳을 마련해주는 관계였달까. 입사 후 같은 멘토링 조에 편성되어 안면을 튼 우리는 서서히 속깊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언니가 누군가와 헤어져 외로워할 때면 나는 언니의 자존감을 회복해주려고 노력했다. 내가 다른 꿈을 꾸면서 시험공부하랴 일하랴 바쁘게 지낼 때, 언니는 늘 건강과 멘탈을 챙겨줬다.
소소한 일탈도 감행했다. 1분만에 갑자기 비행기를 끊어서 일본으로 떠났던 때, 통유리로 된 호텔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으면서 어찌나 수다를 떨었었는지. 여름 휴가를 특별하게 보내자면서 롯데호텔에서 레이디 패키지를 즐기기도 했었다. 자쿠지에 몸을 담그고 야외 정원에서 사진 찍으면서 말 그대로 '스트레스를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처럼 깔깔거리고 웃었더랬지. 점심시간만큼은 멀리 멀리 떠나자면서 고작 회사 근처인 레스토랑으로 소심하게 일탈하고, 날씨 좋은 봄날 경리단 길 카페순회를 감행했던 추억들이 모두 가슴에 생생히 남아 있다. 매 순간 사무실에서 나눴던 일상의 대화, 아침마다 서로의 의상과 메이크업을 칭찬해주던 소소한 즐거움을 추억으로 남겨야 한다. 언니의 빈 자리를 '인정해야 한다.'
결코 처음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입사 후 수많은 사람들이 언니처럼 빈 자리를 남기며 떠나갔다. 이제 입사하면 여러분들 행복 끝 고생 시작이야, 긴장감이 도는 면접실에서 해죽해죽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 줬던 인사팀장. 자못 거칠어보여도 따뜻한 정을 가슴에 담고 있었던 그가 한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짐을 쌌고, 사람들은 너무나도 무심하게 그의 빈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웠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그가 목숨처럼 아끼던 화초를 바라보면서 다짐했다. 나라도 그의 친근한 웃음을 기억하겠노라고. 다음 해 내 인생의 두 번째 팀장이 이별을 고했다. 본인이 원치 않는 사업장으로 발령난 것이다. 가끔 짜증나는 업무를 시킬 때도 있지만 누구보다도 팀원 하나하나를 기억했던 사람. 나는 그가 만들었던 업무매뉴얼 파일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 다짐했다. 개인적인 친분을 이어갈 일 없는 존재이더라도, 잠깐이나마 스쳤다면 잊지 말자고. 그러나 그가 채 자리를 뜨기 전에 책상의 명패는 또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그가 정성스레 만든 업무매뉴얼 파일도 창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떠난 사람의 자리, 습관, 말투, 존재감. 회사는 모든 것을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잊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사람이 간다. 치열한 이 곳에서 긴 시간동안 누구보다 나를 격려해 준 동료이자 친구이자 자매같은 사람이.
누나는 원하던 곳으로 간다며? 잘 됐네, 가기 전에 저녁이나 먹자.
언니를 알던 팀 동기가 툭, 나에게 말을 건넨다. 언니와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나에게 대신 인사를 전하는 것이리라. 어딘가 아쉬움이 차오른다. 서로의 결혼식에 갈 정도로 가깝고 친하게 보였던 두 사람이 말 한마디, 식사 한 자리로 정리되는 현실이. 회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입사원을 언니의 자리에 앉힐 것이다. 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수가 현저하게 줄 것이다. 문득 서러운 마음이 들어 바람을 쐐고 싶을 때도 그냥 모니터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몸이 아파도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없는 사람처럼 일할 것이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 말을 잊고 싶지 않다. 아직은 이별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그 사람은 일을 못 했잖아. 그 사람은 원래 적응 못했으니 싹이 보였지 뭐. 그 사람 더 좋은 곳으로 갔다며, 잘 됐네. 형식적인 포장과 변명어린 면피로 헤어짐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기억할 것이다. 잠깐이나마 내 곁을 스쳐지나간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표정과 목소리, 분위기와 업무 스타일마저도.
결코 가볍지 않았던 그들의 자리가 오늘따라 하나씩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