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일기 둘, 마르살라 립스틱과 감청색 수트
아, 이거 마르살라 색깔이야. 버건디랑 약간 달라.
립스틱 또 샀어? 이번엔 버건디인가? 지나가는 남자 동기의아침 인사에 나는 반갑게 웃으면서 '마르살라' 색상임을 강조한다. 아 정말? 버건디랑 마르살라랑 다른거야? 나는 내 여자친구한테 아무리 설명 들어도 구분이 잘 안되던데. 동기는 멋쩍게 웃는다. 나는 말한다. 응 아주 미묘하게 달라. 올해 유행 컬러래. 어쨌거나 사무실에서 기분 전환하기엔 '새로운 립스틱 바르는 게 직빵이야.'
언젠가 회사 친구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언니는 이 좁고 답답한 사무실의 분위기에 계속 저항하면서 언니의 개성을 표출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티 많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붉은색 염색을 한 것도 그렇고, 가끔 놀랄 정도로 큰 왕반지를 손에 끼고 오는 것도 그렇고. 나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똑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사무직 업무의 반복선. 이 삭막한, 별 것 없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만들려면 나는 사소한 변화를 추구해야 했다. 그로써 나라는 사람이 이 커다란 체계의 작은 일원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라고 되뇌어야 했다. 나라는 사람의 개성과 특별함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늘 변화를 추구했다. 사실 굉장히 제한적인 방식이었지만. 머리스타일을 변경했다. 키보드 위를 춤추는 손톱에 가지각색 네일을 발랐다. 새로운 아이섀도를 눈두덩이에 발랐다. 그리고, 마르살라 색깔의 립스틱을 샀다. 버건디와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마르살라 빛 립스틱도 기분전환용이라기보다는 나의 개성 표출을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내 나름의 발악.
알아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람쥐가 쳇바퀴에 매일 다른 색상의 페인트를 칠한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은 옆 팀 권 사원,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우리팀 동기, 평소 내 생각을 허물없이 공유하는 언니와 회사 친구가 새 립스틱 색상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 뿐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대개 타인의 쳇바퀴를 돌아볼 새 없이 자신의 쳇바퀴를 돌려야 하니 말이다. 물 밀듯 밀려오는 업무와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벨. 크고작은 부서 간 다툼. 어제가 오늘이, 오늘이 내일이 되는 일상. 이 곳에서 타인의 개성을 알아채려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수고로운 노력을 감행할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내 할 일 바쁜데 옆 자리에 앉은 직원의 개성이 무슨 상관이람.
버건디랑 마르살라가 뭔지도 모르는데 립스틱 색깔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람.
그래서 더욱,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사소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그들이 고맙다. 버건디랑 마르살라의 차이를 몰라도 좋다. 마르살라를 버건디로 착각해도, 버건디를 그냥 붉은 색 립스틱으로 이해해도 좋다. 회사 동료의 변화와 개성을 알아차리는 노력을 기울여주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고백하자면 나조차 타인의 개성을 잘 알아채지 못했으니까.
직장생활 7년차. 언젠가부터 남직원 양복 색상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모두가 똑같은 양복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이 건물에서 100% 같은 양복은 없었다. 감색과 감청색이, 곤색과 꽤 짙은 빛깔의 녹색이 달랐다. 육안으로 비슷한 색상이면 재질이 달랐다. 재질까지 같으면 안감이 달랐다. 안감이 같으면.. 아무튼, 무언가는 달랐다. 그들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들만의 개성을 표출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의 특별함을 잊지 않고, 자신을 이 커다란 조직의 일원으로 가두지 않기 위해 사소한 변화를 추구한 것은 아닐까.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보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보인다. 박대리의 클러치가 보인다. 김 대리의 코가 약간 높은 구두 끝도 보인다.
일상이 단조로워질수록 타인의 변화를 인지하는 사람이고 싶다. 마르살라와 버건디. 뭐가 뭔지는 몰라도 아침인사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사람. 감청색 재킷을 보면서 '어제 감색 재킷이랑 다르네, 새로 샀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동료 모두를 다른 사람으로, 특별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사람. 이 정도 즐거움은 있어야 삭막함이 줄어든다. 어떻게보면 우리 모두 쳇바퀴를 돌리며 살아가는 애잔한 사람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