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Apr 30. 2018

마지막 사랑니를 빼면서

에필로그: 안녕, 인도!


  집이라 부르던 곳을 떠나 공항으로 출발한 때는 오후 햇살이 기분 좋게 풀어지는, 바야흐로 황금빛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어느 것 하나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공항에 들어서면서는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를 공항까지 태워다 준 에이즈 사업장 간사는 꼭 엎질러지려는 물동이를 잡듯이 황급히 말하는 투로 내게 울지 말라고 했다. 그 말에 애써 꾹 눌러놓기는 했지만, 카운터에 가서 여권과 E티켓을 내밀고 묻는 말에 또박또박 답하긴 했지만, 사실 그때부터 이미 나는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한 번도 울면서 떠난 적 없는 곳을 이제야 이렇게 울면서 떠난다.

  마치 한 번도 한국에 돌아간 적이 없는 것 같은, 꼭 인도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작 2년 전 같은 날짜엔 제법 가뿐하게 떠났는데, 불과 한 달 머물고 떠나기를 이렇게 발이 무거울 수가 없다.

  이렇게 인사하고 돌아가면 얼마나 긴긴 그리움의 날들이 이어질지 기약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슬펐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 언젠가 또 이곳을 찾아올 수 있다. 생각보다 가까운 미래에 재회가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건 가능성과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누구도 계산 같은 거 하지 않았는데 그냥 알 수 있었다. 나의 인도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있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가서도 꾸준히 느껴지던 우리의 연결고리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앞으로도 나는 여기서 만난 이들을 사랑할 것이고, 우리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겠지만, 이전과는 다르리라는 것을.




  정신없이 E티켓을 각각 내미느라 옆자리로 달라는 말을 미처 못했다. 그래도 얼굴이 똑 닮은 여자 둘이 같이 와서 체크인을 했으니 어쩌면 좌석을 나란히 주었으려나 했는데, 자리가 멀어도 이렇게 멀 수가 없었다. 뭐 미리 말을 못 한 우리 잘못이려니 하고 동생과 나는 각각 혼자 여행하는 사람처럼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동생과 따로 앉아 좋은 건 딱 하나였다. 이제야 좀 맘 놓고 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말자고 생각하자마자,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가 셀카를 찍으며 은근히 프레임에 나까지 넣어 찍는 걸 보았다. 아시안 걸프렌드니 뭐니 하는 이름으로 구글에 검색되는 꼴을 볼 수는 없는지라 얼굴을 가리고 남자를 째려본 다음 황급히 수면 안대를 뒤집어썼다. 눈웃음 짓는 고양이 모양을 한 안대 뒤에서 말없이 조금 울었다. 그래도 흐느껴 울지는 않으려고 아무 음악이나 틀었는데 하필 나오는 가사 한 마디가 마음을 건드린다. 노래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도 상관없이, 단 한 소절만으로.


오랜 날 오랜 밤 동안 정말 사랑했어요


  그건 인도를 향한 내 마음이었다.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다면 그것뿐이랄까.



  몇 시간 후. 울면 좀 나아진다. 애써 힘내자는 의미로 기내식 샐러드에 있던 콩깍지를 씩씩하게 콱콱 씹어먹었다. 아침 식사에 넣을 콩을 매일같이 자르던 시절을 추억하며. 그런데 그게 콩이 아니라 고추였다. 슬플 때뿐 아니라 매울 때도 눈물이 나는구나. 결국 한번 더 울었다. 우는 사이 비행기는 연착되었고 우리는 델리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출국 심사도, 드넓은 델리 공항의 구석구석도, 무엇 하나 감상적으로 굴 틈 없이 바삐 스쳐갔다. 어이없는 시트콤의 결말처럼,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우당탕탕 구르듯 돌아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도 어언 6개월이나 되었다. 아이들을 못 본 지 또 반 년이나 되었다니. 시간도 빠르고 모두들 빠르고 나만 느린 것 같다.


  며칠 전부터 입안이 욱신거린다 싶어 하나하나 짚어보니 사랑니가 올라오고 있었다. 경악했다. 사랑니 세 개를 뺐다고 마지막 하나가 나지 말란 법은 없지만, 보통은 한두 개만 빼고 끝나는 사람들도 많다기에 이 정도 고생했으면 끝이려니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니 세 개가 우후죽순처럼 앞다투어 올라오던 시절에는 적어도 놀랍진 않았는데, 2년 가량 잠잠하다가 갑자기 느끼는 사랑니의 공격은 당혹스러워 더욱 아팠다.


  이전에 난 사랑니 세 개는 모두 인도에서 뺐다. 첫 사랑니는 집에서 쫓겨나 있던 시절에 뺐다. 갑자기 들이닥친 극우 힌두교도들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래서 단기봉사 팀을 모두 보내고도 하릴없이 부유하고 있는 느낌이었고, 그래서 사랑니를 빼고 앓아누운 시간이 괴로운 한편으로 외려 고마웠다. 갑자기 무풍지대가 되어 버린 일상을 납득하기 어려웠던 때였으니까. 지금은 처방 없이는 살 수도 없는, 가장 센 진통제를 먹고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걸 느끼며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며칠의 기억이 온통 그뿐이다. 단지 언니들이 끓여주는 죽을 먹는 게 참 고맙고 따스했다는 기억만 짙게 남아있다.


  한참 앓고 나서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마늘을 다지는 것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다진 마늘통이 비어 있었고, 내겐 무엇이든 할 일이 필요했을 뿐이다. 예상치도 계획하지도 않은 무위의 시간, 왜 이렇게 된 건지도 설명해 줄 이 없던 그 시간에 심란한 마음으로만 갈팡질팡할 뿐 도무지 무엇도 하질 못하던 차였으므로, 나는 그때 마늘을 다지며 행복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첫 걸음이었다. 인간에겐 적당량의 노동이 꼭 필요하단 것도 새삼스럽게 실감하며, 그렇게 첫 사랑니를 뒤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난리통을 겪고 결국 이사한 집에서 두 번째 사랑니를 뺐다. 그때까지 살던 집은 넓다란 2층 집에 마당을 품고 있어 어디 있어도 서로가 한눈에 보이는 구조였는데, 이사한 집은 더 좁되 층수가 많은 집이었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과 공간이 분리되기 시작했으며, 이전 집이 비해 서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같이 사는 간사와 아이들끼리도 큰 대화 하지 않고 하루가 후루룩 넘어가기 십상인 집이었다.


  그러니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인력은 더 적었다. 사랑니를 뺐을 때 죽을 끓여 주던 언니들은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사랑니를 빼고 돌아와도 쉴 틈이 없었다. 반대쪽 사랑니도 비슷한 시기에 올라온 탓에 곧 빼야 할 것 같은 상태라 더욱 힘들었다. 진통제 기운에 맥을 못 추는 내게 아이들은 졸리면 가서 자라며 까불거렸다. 졸린 게 아니라 어지러운 거고, 그 이유는... 차곡차곡 설명을 해 주니 아이들은 저도 사랑니가 나는 것 같다고 심각해졌고 그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던 듯하다.


  세 번째 사랑니를 빼기 전에 우리는 또 한 번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직후라 갑자기 환경이 너무 급변한 데다가 학기말이라 긴긴 여름 방학이 코앞이었다. 그때는 나와 다른 디디 단 둘뿐이어서 무진장 고생을 했다. 수능 끝난 고3 교실 같은 분위기에서 수업을 진행하려는 기분이 그러할까. 사랑니를 빼고 왔다고 내가 드러누우면 다른 디디 한 명이 그걸 다 감당해야 할 판이었다. 결국 평소처럼 하루를 보내고, 유난히 길었던 아이들과의 입씨름까지 다 치르고 나니 마음속이 쑥대밭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자러 간 밤, 서러운 마음에 오피스 책상에 청승맞게 고개를 묻고 한참 울었다. 같이 있던 친구에게 괜히 섭섭하고 지레 서러운 마음이 울컥 올라와서 그랬다. 울면서 대강 마음을 가라앉힌 후 같이 지내던 디디에게 그 마음을 말하고, 차분하게 한참 대화를 했다. 처음부터 여태까지 늘상 친하게만 지내고 있는 그 디디와 겪은 유일한 갈등의 날로, 그렇게 그 날은 기억에 남아 있다.



  세 개의 사랑니를 각각 다른 집에서 뺐는데 어느 하나 올바르게 난 게 없어서 매번 잇몸을 째고 제법 대공사를 벌여야 했다. 그 시기란 게 어쩌다보니 제다 그 집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와 얼추 맞물린 때였다. 그래서 내게 사랑니를 뺀다는 건 단순히 이를 빼는 느낌만은 아니다. 마음에서도 살을 째고 힘주어 뭔가를 끄집어내고 한참 끙끙거리며 고통을 다독여야 하는, 인생의 어느 한 조각이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사랑니 발치 예약을 잡고서 문득 생각했다. 인도에 간 지 서너 달만에 첫 사랑니를 뺐고, 그 후로 주요 고비마다 사랑니를 하나씩 뺐고... 이제 인도에 대한 글까지 닫으며 마지막 사랑니를 빼는구나. 사랑니와 함께 시작해 이제 끝난다.


  마지막 사랑니는 다행히 올바르게 났다. 이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아래에 받쳐 줄 이가 없으므로 빼는 게 낫다는 소견과 함께 의사 선생님은 힘주어 사랑니를 뺐다. 이번만큼은 잇몸을 째지도, 앓아 눕지도 않았다. 다만 꼭 두 번째 사랑니를 뺐던 날처럼 날씨가 을씨년스러웠고, 세 번째 사랑니를 뺐던 날처럼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허했다. 그래서 그 날 하루 종일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치 첫 사랑니를 뺐던 그 날처럼.


  사랑니를 모두 뺐다. 이제 내게 남은 사랑니는 없다.






써니디디의 인도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그 동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각자의 마들렌, 기억의 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