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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26. 2020

사랑이 우리를 구하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 (2020, 이경미 감독)

공개 전부터 들썩들썩했다. 이경미 감독, 정세랑 작가, 정유미 배우. 모두 좋아하는 이름이었지만 정작 <보건교사 안은영> 공개 당시 나는 무덤덤했다. 언론에서도 주변에서도 심지어 지나가는 택시와 버스 차창에도 안은영이라는 이름을 와글와글 이야기했지만, 누가 물어오면 늘 한 문장으로 답했다. "나 SF 안 좋아해."


그러나 이번에도 내가 나를 제일 몰랐다. 나 따위가 내 취향을 알 리 없지. 감탄하며 읽은 수많은 정세랑 소설 중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이 <목소리를 드릴게요>였고, <보건교사 안은영>은 1화부터 좋았다. 좋아하게 될지 아닐지 모르겠다는 상태로 보다가, 젤리가 터지는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 <보건교사 안은영>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눌러 놓았던 괴물의 봉인이 해제되고, 사랑에 마음 다친 아이들이 그 위로 몸을 던질 때, ("아이고,  날아가네!") 안은영은 비비탄 총을 정확히 쏘아 괴물을 맞힌다. 온갖 토템과 '인간 토템' 인표의 에너지까지 끌어다 쓴 끝에, 방금까지 오컬트 섞인 히어로 이야기였던 이 드라마는 난데없이 색깔을 달리한다.


알록달록한 색색의 하트 젤리가 투둑투둑 온 세상에 떨어진다. 텔레토비나 젤라비에 나올 것 같은, 부드럽고 달콤할 것만 같은 젤리들이. 얼핏 조화롭지 않아 보이는 이 장면에서 갑자기 울컥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연못에 몸을 던져온 이들의 사랑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거기 남아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보다 더 선명하게.


보건교사 안은영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릿하다. "비누장미" 같이 오래오래 거기 남아있는 죽음도 있고, 잔혹하게 끝난 생을 짧고 서러운 울음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인표 할아버지의 기운도 여전히 서재 곳곳 반짝반짝 묻어 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은 수많은 죽음 뒤에도, 다양하게 수상한 삶 뒤에도, 젤리 같은 마음들이 남아 있다.


안은영의 세계에서 흐릿해지는 건 삶과 죽음의 경계뿐이 아니다. "내 몸이 좋아진다 좋아진다 좋아진다"라는, 더없이 좋은 말을 하면서 있는 힘껏 웃음을 터뜨리는 학생들의 얼굴을 보면, 그간 알아왔던 '웃음'이란 단어 이면을 갸웃거리며 다시 보게 된다. 웃음이란 보면 기분 좋아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괴이할 수도 있는 건가? "안전한 행복"도 그렇다. 좋은 단어들로만 조합되어 있는데, 이렇게나 수상쩍다니.


원작을 다 담지 못해 교정에 남겨두었다지만 오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고, 동상이 "안녕하세요." 인사하거나 허허 웃는 것도 마치 오래된 괴담에서 잘라온 것만 같은 장면들이다. 이집트 십자가와 바티칸 묵주부터 부석사 염주와 교토 신사의 부적, 터키 액땜 부적인 '악마의 눈'까지 죄다 끌어모은 안은영의 토템 목록도 그렇다.

토템 중의 토템은 인간 토템...

가장 경계에 서 있는 존재는 안은영 그 자체다. 애들은 그냥 빨리 다 졸업했으면 좋겠고, 다짜고짜 영어를 내뱉는 원어민 교사에게는 한국의 욕을 담아 "뭔 소리야, 한국말로 해"라고 일갈하고, 피곤하다 소리도 꽤나 자주 하는 현실적인 존재.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젤리 세계를 끊임없이 때리고 부수는 존재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도 외치지 않고, 돈과 명예도 갖지 못한 히어로. 그럴듯한 요술봉이나 전신 슈트 하나 없는 건 둘째 치고, 무지개 칼과 비비탄 총조차 시간제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히어로.


안은영의 매력은 이 경계에서 온다. 경계의 대척점이 어딘지 모르지만, 확신이란 감정은 거기 살고 있을 것이다. 안은영에게는 확신이 없다. 눈에 보이는 것도, 믿고 따르던 존재도 다 100%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자리에 산다.


확신이 없지만 강박도 없다. 여기는 강박을 공기처럼 들이마시는 21세기 대한민국이기에, 안은영이라는 캐릭터는 분명하게 빛난다. 웃음은 "좋은" 것이라는, 안전과 행복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기괴하게 뒤틀린 광경은 어쩐지 낯설지 않다. "좋은" 것을 위해 내달리는 모든 순간 중, 노력이라는 단어로 덮인 강박이 얼마나 많을까. 좋아 보이지만 사실 좋지 않은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 왕자>의 한 마디를 굳이 빌려오지 않더라도, 확신도 강박도 없는 안은영의 동력이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님은 자명하다. 안은영은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무엇 때문에 그는 비누장미 같은 정현의 죽음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부서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강선을 추억하고, 스무 살 넘게 살아본 적 없는 옴잡이 혜민의 삶을 경계선 바깥으로 놓아주었나.


그냥 인간에 대한 곧은 사랑, 그뿐이었다. 수업 시연을 위해 인체 모형을 업고 교실마다 돌아다니는 안은영의 모습은 그 삶의 은유처럼 보인다. 성실한 직장인이기에 성실한 히어로인 안은영은, 애초에 성실한 인간이고 성실한 어른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부풀려 전시하지 않는, 자신을 과시하지도 연민하지도 않는 성실한 인간. 성인에 가까워도 분명 아직 미성년인 아이들을 지키는 성실한 어른. 사랑이 우리를 구하지. 이토록 선하고 바르게, 이토록 성실하고 피로하게.


안은영을 보며, "나 SF 안 좋아해."라는 말을 정정해본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건 누군가 다치는 이야기, 봉합되지 않은 상처에서 피든 뭐든 흘러내리는 이야기였다. 백날 휘둘러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 무지개 칼은 괜찮았다. 확신에 찬 고학력자가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야만 이야기가 굴러가는 것도 별로였다. 능력의 한계가 명확해 직장인의 지친 저녁을 이해할 수 있는 히어로, 나란히 앉은 존재가 만들어준 설정을 밀고 나가는 히어로는 마음에 들었다. 미국을 구하는 김에 세계도 대충 같이 구해주는, 시혜적인 히어로들도 싫었다. 끝내 자기 같은 존재를 외면하지 못해 손 내밀고 마는 히어로는 좋았다.


이렇게 선하고 바른 주제가 이토록 재미있게 비틀리기도 쉽지 않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더없이 어울리는 히어로, 안은영의 비틀린 세계가 앞으로 더 기대된다. 암만 봐도 6화까지는 프리퀄이었으니, 기묘한 음악과 함께 젤리가 팡팡 터지는 이 세계가 부디 다음 시즌으로 또 찾아와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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